오피니언 분수대

보아라 이게 스포츠다

중앙일보

입력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보고 있나?'

세계 58위 정현(22)이 지난 22일 호주오픈 남자 단식 16강전에서 메이저 대회를 12회나 우승했던 노박 조코비치(31)를 세트 스코어 3-0으로 꺾어 한국 테니스 역사상 처음으로 메이저 대회 8강에 오른 직후 중계 카메라 렌즈 위에 한글로 쓴 말이다. 그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함께 고생했던 옛 감독을 위한 이벤트"라고 밝혔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스포츠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채 오로지 정치적 논리로만 평창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에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문재인 정권과 그 지지자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로 읽혔다.

정현이 호주오픈 16강전에서 조코비치를 3-0으로 꺾은 후 중계카메라에 '보고 있나?'라고 한글로 썼다.

정현이 호주오픈 16강전에서 조코비치를 3-0으로 꺾은 후 중계카메라에 '보고 있나?'라고 한글로 썼다.

정현은 불과 2년 전 이 대회 1회전에서 당시 세계 1위 조코비치에 0-3 완패를 했다. 그간 정현의 기량이 늘고 조코비치는 팔꿈치 부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는 하나 랭킹만 보자면 이번 승리는 불가능에 가까운 기적이나 마찬가지다. 이낙연 국무총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메달권에 있지 않은" 선수가 큰일을 낸 셈이다. 경기 전 호주 오픈 조직위원회도 8대2 확률로 조코비치의 승리를 전망했다.

2018 호주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한 정현. [뉴스1]

2018 호주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한 정현. [뉴스1]

정현은 "어릴 적 우상인 조코비치를 따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며 승리하고도 겸손했고, 조코비치는 "정현의 승리에 누가 될 수 있으니 나의 부상 얘기는 그만 하자, 그는 나보다 나은 선수"라며 패배를 부상 탓으로 돌리는 대신 상대의 실력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진심으로 축하했다. 랭킹에 주눅 들지 않고 결국 자신의 우상을 넘어선 과감한 도전, 그리고 진정한 챔피언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위대한 스포츠맨십은 승패를 떠나 전 세계 스포츠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노박 조코비치가 정현과의 호주오픈 남자 단식 16강전 후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포스팅. '대단한 경기였다'고 정현을 칭찬했다. [사진 인스타그램 캡처]

노박 조코비치가 정현과의 호주오픈 남자 단식 16강전 후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포스팅. '대단한 경기였다'고 정현을 칭찬했다. [사진 인스타그램 캡처]

조코비치는 호주오픈 남자 단식 16강전 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도 정현에게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사진 인스타그램 캡처]

조코비치는 호주오픈 남자 단식 16강전 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도 정현에게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사진 인스타그램 캡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도 위로받았다는 글이 쏟아졌다. 특히 한국에선 '단일팀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렸다'거나 '상처받은 국민 위로하려고 전 세계가 몰카(몰래카메라) 찍는 건가''우승도 아닌 8강이 이렇게 벅찬 감흥이 있는데 올림픽 참가라는 평생의 꿈을 조롱하지 마라'며 정부의 불공정한 평창올림픽 단일팀 강행에 빗댄 글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비인기 종목 테니스에서 나온 경사를 보고 있자니 똑같은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겪다 못해 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불공정한 룰의 희생양이 된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들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충북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을 방문해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단을 만났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충북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을 방문해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단을 만났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비단 올림픽 뿐만이 아니라 스포츠 경기가 매번 보여주는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 그 자체가 감동적이다. 명성과 무관하게 공정한 룰에서 오로지 실력으로 인정받는 모습을 보며 꿈을 키우고 용기를 얻는다. 그런데 정부는 '평화'를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정치적으로 '좋은 그림'을 만들자는 집착으로 비인기 종목, 그것도 상대적으로 약자인 여자 선수의 희생을 당연시했다. 그러니 아무리 문재인 대통령이 "감동의 명장면"을 얘기하고 또 설령 그런 의도했던 그림이 나중에 만들어진다한들 감동이 있을 턱이 없다. 게다가 우리 선수가 추가 엔트리라는 원치않는 '혜택'을 받아 경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지면 화 나고 이겨도 개운치 않은' 상황에 놓이게 됐으니 국민들은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메달권도 아니라느니, 단일팀 이벤트 덕분에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씻어 낼 것이라느니, 개최국이 아니었으면 출전도 못했을 것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정부와 여당 인사들에게 정현의 '호주대첩'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보아라, 이게 스포츠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