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열며

벤처 기 꺾는 '기술 도둑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한양대 전자공학과 출신인 김 사장은 삼성전자.현대전자에서 10여 년간 근무하다 1989년 창업했다. 그의 회사(서오기전)는 당시 수입에 의존했던 원자력 발전설비 부품 150여 가지를 국산화했다. 그 공로로 통상산업부(현 산업자원부) 장관 표창, 정밀기술진흥대회 금상 등을 받기도 했다. 사업이 안정되자 그는 새로이 정보기술 분야에 도전하기 위해 2000년 서오텔레콤을 설립했다. 엔지니어답게 그는 연구개발에 주력했고 무선 이어폰, 이동통신망 비상 호출처리장치 등을 개발했다. 설립 초기여서 매출은 미미했지만 특허가 하나 둘 쌓여 갔고, 그의 희망도 커갔다. 그러나 소송을 제기한 이후 모든 게 바뀌었다. 대기업과의 싸움은 생각보다 훨씬 힘겨웠다. 급기야 25명이었던 직원을 7명으로 줄이고, 연구개발과 제품화 추진은 거의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특허분쟁으로 특허심판원에 시비를 가려 달라고 요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2000년 388건이었던 특허분쟁 청구건수(실용신안 제외)가 지난해 775건으로 5년 만에 배로 늘었다. 전문가들은 특허 출원 증가와 함께 산업재산권에 대한 권리의식이 높아진 때문이라고 한다. 또 산업재산권 침해에 무감각한 탓도 있다. 며칠 전엔 컴트루테크놀로지라는 벤처기업이 "B사가 프로그램을 인수하겠다고 양해각서를 체결한 뒤 기술만 빼간 채 인수를 거부했다"고 폭로한 일도 있었다. 벤처기업으로선 대기업 격인 B사 측은 "품질 기준에 맞지 않아 인수 협상을 그만둔 것뿐"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서모 변리사는 "싸워야 큰다는 말도 있듯이 특허분쟁을 나쁘게 볼 것만은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특허분쟁은 싸움 자체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한 예로 대기업이 납품권을 미끼로 하청업체가 개발한 기술을 공동 특허 출원하자고 요구하는 경우를 들었다. 공유 특허권자가 되면 상대방 허락 없이 특허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사실상 특허를 빼앗기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납품을 계속하려는 중소기업으로선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선 중소기업의 기술 개발 의욕이 생겨날 수 없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고 중소기업이 약해지면 대기업도 경쟁력을 갖출 수 없음은 자명하다.

최근 벤처기업 수가 1만 개를 넘어섰다. 벤처기업은 신기술이나 아이디어를 사업화하려는 곳이다. 창의성이 경쟁력인 시대에 벤처는 한국 경제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세계 최대 부호인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는 20여 년 전 벤처기업으로 출발했다. 요즘 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구글도 주차장에서 창업한 벤처기업이다. 이 같은 벤처 신화가 한국에서도 나와야 한다. 그러려면 기술 존중 풍토부터 갖춰야 한다.

"회사 설립 이후 일요일.공휴일도 없이 숱하게 밤을 새웠던 기술자가 소송에 휘말려 연구 대신 생산성 없는 자료 수집이나 소송 준비로 밤을 새우고 있으니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입니다." 김 사장의 부인이 최근 남편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대통령 앞으로 보낸 편지 내용이다. 김 사장의 억울함 여부는 대법원에서 가려지겠지만 이런 비생산적인 다툼은 이젠 사라져야 한다.

차진용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