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주차장 내주고 주민이 '밥 당번'···유기견 '공동돌봄' 실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유기견, 입양 혹은 안락사 아닌 '공동돌봄'이 해결책?

녹번동 주민들 유기견 공동돌봄 실험 #은평뉴타운 조성 당시 버려진 개 많아 #북한산 탐방객 등 “공포 느낀다” 민원 #입양 가능성 적고 대부분 포획 후 안락사 #주민들이 나서서 십시일반 유기견 돌봐 #돈 걷어 텐트 마련하고 당번제 배식까지

유기견 뚜치가 올가미에 걸린 채 발견된 건 폭우가 쏟아지던 지난해 7월 초였다. “전기 올가미에 묶인 목과 가슴 부위에 손바닥 한 뼘 길이의 깊은 상처가 있었고 피가 쏟아져 나왔다”고 녹번동 주민 허은영(47)씨는 그 날을 회상했다.

지난해 7월 초 올가미에 묶인 채 발견된 유기견 뚜치. 병원으로 옮겨져 제거 수술을 받았지만 이미 겨드랑이 근육 상당이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사진 녹번동 주민 모임]

지난해 7월 초 올가미에 묶인 채 발견된 유기견 뚜치. 병원으로 옮겨져 제거 수술을 받았지만 이미 겨드랑이 근육 상당이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사진 녹번동 주민 모임]

주민의 구조요청 신고를 받고 출동한 동물단체가 뚜치에게 진정제를 투입한 뒤 포획했다. 뚜치는 병원으로 옮겨져 올가미를 제거했지만 이미 겨드랑이 근육의 상당을 잃은 상태였다. 주민들의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뚜치의 치료비를 댔다. 상태가 호전된 뚜치는 지금 녹번동 중턱에 주민들이 마련한 텐트에서 새끼들과 함께 살고 있다.

주민들이 돈을 모아 녹번동 빌라촌 중턱에 마련한 유기견 보금자리. 두 개의 텐트 주변에 이불과 물, 사료 통 등이 놓여있다. 홍지유 기자

주민들이 돈을 모아 녹번동 빌라촌 중턱에 마련한 유기견 보금자리. 두 개의 텐트 주변에 이불과 물, 사료 통 등이 놓여있다. 홍지유 기자

녹번동 독바위공원 인근 빌라촌 한 가운데에는 ‘유기견 보금자리’가 있다. 동네를 떠도는 유기견 6마리를 위해 빌라촌 언덕 부근에 사는 주민 10여 명이 돈을 모아 마련한 것이다. 일부 주민은 사료비를 대고 텐트를 기부했다. 비나 눈이 오면 들어올 수 있도록 주차장을 유기견들에게 내놓은 집주인도 있다. 이 주민들은 돌아가며 ‘밥 당번’을 선다. 일주일에 하루 꼴로 유기견들에게 깨끗한 물과 사료, 사상충 약 등을 챙겨 먹인다. 두 마리는 동물단체의 도움을 받아 중성화 수술을 마쳤다. 최근엔 주민 20여 명이 서명한 포획 반대 성명서를 모아 서울시청과 은평구청에 제출하기도 했다. 뚜치의 이야기를 실은 ‘우리 동네(녹번동) 개들 이야기’ 홈페이지에는 1000명이 넘는 시민이 포획 반대 서명 운동에 참여했다.

녹번동 주민들이 직접 만든 서명지. "동네 개들을 무작위로 포획하는 행위를 중단해 달라"는 요청이 서울시청과 은평구청에 전달됐다. [사진 녹번동 주민 모임]

녹번동 주민들이 직접 만든 서명지. "동네 개들을 무작위로 포획하는 행위를 중단해 달라"는 요청이 서울시청과 은평구청에 전달됐다. [사진 녹번동 주민 모임]

야생화된 유기견을 보는 시각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현행법상으로는 야생화된 유기견이라도 포획틀로 생포해 입양될 기회를 준다. ‘들개’를 선뜻 입양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 안락사 될 것이 분명하면서도 그렇게 한다. 문제는 이 방법으로는 야생화된 유기견의 개체 수를 줄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학습 능력이 좋은 개들은 포획틀을 쉽게 피해간다. 마취총은 한 번에 여러 마리를 조준하기 어렵고, 마취에 들기까지 30분가량 개들이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추적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산 속에 떼로 무리지어 다니며 탐방객에게 공포심을 주는 야생화된 유기견들은 총으로 즉시 쏴 죽여 개체수를 줄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주민들은 유기견 보금 자리 주변에 "가까이 가거나 큰 동작을 하지 않으면 위험하지 않다"는 내용의 안내문과 함께 주민 대표의 연락처를 게시했다. 홍지유 기자

주민들은 유기견 보금 자리 주변에 "가까이 가거나 큰 동작을 하지 않으면 위험하지 않다"는 내용의 안내문과 함께 주민 대표의 연락처를 게시했다. 홍지유 기자

녹번동의 개들도 이와 같은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 일부 주민들의 목소리도 강경하다. 녹번동 주민 김모(65)씨는 “이 거리를 지나다니면 몇 마리의 개가 한꺼번에 짖어 움찔하게 된다”며 “ 개를 집에 들이지 않고 길가에 풀어 키우는 것은 민폐”라고 말했다. 구내 유기견 문제를 담당하는 신민상 은평구청 생활경제과 주무관은 “녹번동에 새로 이사온 주민들과 등산객들, 인근 어린이집 등에서 민원이 들어왔다”며 “개들이 길거리에 떼지어 사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주민이 신고한다면 잡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주인과 함께 가정집에 사는 반려견이 아닌 이상, 민원이 들어오면 유기동물에 준해 포획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녹번동 빌라촌에는 어미개 뚜치와 새끼 등 6마리가 모여산다. 홍지유 기자

녹번동 빌라촌에는 어미개 뚜치와 새끼 등 6마리가 모여산다. 홍지유 기자

실제 녹번동에서도 작년 초 인근 동네 주민의 신고로 다섯 마리가 포획돼 보호소로 보내지는 일이 있었다. 서울 시내 야생 유기견 개체 수는 지난해 초 100마리에서 1년 사이 170여 마리로 늘었다. 이 중 약 60%가 북한산이 있는 은평구에 밀집해 있는 것으로 시는 추정하고 있다.

하루 평균 170여 마리의 반려견이 버려지고 있지만 현재로선 뾰족한 해법이 없다. 유기견 입양률은 증가 추세지만 아직까지 30% 안팎에 그친다. 포획이나 사살, 안락사는 이미 발생한 문제를 뒤따라가며 처리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김혜란 카라 이사는 “애초에 ‘유기’와 ‘들개화’ 발생을 줄이는 노력을 병행하지 않는 한, 한 번에 여러 마리씩 새끼를 낳는 개들을 모조리 없애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동물보호단체는 중성화 수술(번식 억제)과  동물등록제(유기 방지)를 해결책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 역시 이미 버려져 야생화된 개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유기견들에게 사료와 약을 먹이고 있는 녹번동 주민. 홍지유 기자

유기견들에게 사료와 약을 먹이고 있는 녹번동 주민. 홍지유 기자

이같은 상황에서 녹번동 주민들의 실험이 좋은 선례라는 것이 동물단체들의 의견이다. 녹번동 주민들은 ‘죽음’과 ‘입양’사이에서 대안을 찾았다는 것이다. 전진경 카라(KARA·동물보호시민단체) 이사는 녹번동 주민들의 공동 돌봄을 “죽음 외에 다른 선택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산에서 오랜 시간을 살았던 유기견이 입양될 가능성은 극히 낮아, 대부분 포획당한 뒤 일정 시간 보호소에 머물다 안락사를 당한다. 전 이사는 “야생화된 유기견들이 개인 가정의 반려견이 될 수 없다면 그 차선책으로 공동 돌봄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카라와 성서대 사회복지학과는 녹번동의 선례를 바탕으로 노원구 중계동 백사마을에 소규모 들개 쉼터를 만들 예정이다. 사람들을 따르는 일부 개체에 한해 중성화 수술을 시킨 뒤, 주민들이 공동으로 돌보는 모델을 시범적으로 운영하겠다는 취지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15년 기준 반려견 등록률은 약 55%로 전체 177마리 중 97만 마리의 반려견이 동물 등록을 마쳤다. 작년 유기 동물 처리 현황은 입양(30%)·자연사(25%)·안락사(20%)·소유자인도(15%) 순으로 나타났다. 동물등록제가 도입된 2014년 이후 안락사 비율은 줄고 소유자 인도 비율은 증가하는 추세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