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84세 할머니 30년만의 여행은 악몽···'노숙장 제주공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르포]2년 만에 또 '노숙장'된 제주공항…폭설·결항사태 2500명 쪽잠

제주공항 폭설로 결항이 이어지자 항공권을 구하기 위해 대기중인 심상희 할머니가 자신이 겪은 하루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최충일 기자

제주공항 폭설로 결항이 이어지자 항공권을 구하기 위해 대기중인 심상희 할머니가 자신이 겪은 하루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최충일 기자

사돈댁과 함께 30년 만에 제주로 가족여행을 온 심상희(84·여·강릉시 구정면)씨는 악몽 같은 하루를 보냈다. 사흘 동안 내린 폭설로 인해 항공기 결항 사태가 속출하면서 제주에 발이 묶인 것이다. 심씨 가족은 애초 예정대로 11일 오후 1시 김포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제주국제공항에 갔지만,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오전 내내 쏟아진 폭설로 인해 항공기 운항이 지연됐기 때문이다.

84세 심상희 할머니 30년만의 제주여행 '악몽' #제주공항, 결항사태로 거대 노숙장으로 탈바꿈 #전날 결항 7000명 수송작전…12일 날씨 풀릴듯

제주공항 폭설로 결항이 이어지자 항공권을 구하기 위해 대기중인 심상희 할머니가 자신이 겪은 하루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최충일 기자

제주공항 폭설로 결항이 이어지자 항공권을 구하기 위해 대기중인 심상희 할머니가 자신이 겪은 하루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최충일 기자

이후 심씨 가족은 이날 오후 늦게까지 공항에서 대기하며 비행기를 타려 했지만 허사였다. 어렵게 표를 구해 짐 검사까지 마친 후였지만 오후 6시 30분쯤 다시 활주로가 폐쇄돼 탑승구 밖으로 나와야 했다. 심씨는 6시간여가 지난 후 다시 출발 게이트로 들어가 짐 검사까지 마쳤으나 발길을 돌려야 했다. 새벽 시간인 이날 오전 12시 50분에 "특별기를 타게 해준다"는 말에 짐을 들고 따라나섰지만, 또다시 폭설 때문에 운항이 취소된 것이다.

제주공항 폭설로 결항이 이어지자 항공권을 구하기 위해 대기중인 심상희 할머니가 자신이 겪은 하루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최충일 기자

제주공항 폭설로 결항이 이어지자 항공권을 구하기 위해 대기중인 심상희 할머니가 자신이 겪은 하루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최충일 기자

결국 심씨의 아들 최봉령(56)씨는고령인 어머니 심씨와 장모를 위해 공항 인근에 펜션을 잡았다. 폭설로 인해 공항 인근 숙박업소들까지 모두 동이난 상태여서 렌터카 직원 등에게 백방으로 문의한 끝에 잡은 숙소였다. 최씨는 "추가로 들어간 렌터카와 펜션 요금은 둘째 치고라도 어머니와 장모님, 가족들이 고생한 것만 생각하면 너무도 미안하고 화가 치민다"고 말했다.

제주 공항 폭설로 결항이 이어지자 12일 오전 12시25분 공항 체류객들에게 모포를 나눠주고 있다. 최충일 기자

제주 공항 폭설로 결항이 이어지자 12일 오전 12시25분 공항 체류객들에게 모포를 나눠주고 있다. 최충일 기자

폭설로 인해 제주공항의 항공기 운항이 극심한 차질을 빚으면서 공항 곳곳이 대규모 노숙장으로 변했다. 지난 11일에만 세 차례 활주로가 폐쇄됨에 따라 야간 체류 승객 2500여 명이 공항에서 밤을 지새우거나 인근 숙박업소를 전전해야 했다.

12일 오전 12시 25분쯤 제주공항 대합실. 공항 안팎에서 대기 중이던 체류객 수천 명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제주공항 측과 제주관광공사 등에서 나눠주는 깔개와 모포 등을 받기 위해 모여든 항공기 승객들이었다.

제주 공항 폭설로 결항이 이어지자 12일 오전 12시25분 공항 체류객들에게 모포를 나눠주고 있다. 최충일 기자

제주 공항 폭설로 결항이 이어지자 12일 오전 12시25분 공항 체류객들에게 모포를 나눠주고 있다. 최충일 기자

불과 1~2분도 안 돼 늘어선 줄의 길이는 공항 3층의 2번 게이트 주변을 두 바퀴나 휘감을 정도로 길었다. 곳곳에서는 “모포를 더 달라”는 고함도 들렸다. 1인당 1개씩 지급되는 모포를 아이들의 것까지 달라고 하면서 승객과 직원들 간의 실랑이도 벌어졌다. 이 사이 매트리스와 모포 2700세트, 생수 7500병 등이 체류객들에게 지급됐다.

제주 공항 폭설로 결항이 이어지자 12일 오전 12시25분 공항 체류객들에게 모포를 나눠주고 있다. 최충일 기자

제주 공항 폭설로 결항이 이어지자 12일 오전 12시25분 공항 체류객들에게 모포를 나눠주고 있다. 최충일 기자

제주도와 한국공항공사 측은 12일 오전 1시 30분 이후 항공기 운항이 전면 중단되자 체류객 지원 매뉴얼 중 최고 단계인 '심각'을 발령했다. 2년 전인 2016년 1월 폭설에 따른 공항 마비 사태로 대혼란을 겪은 이후 만들어진 관심·주의·경계·심각 단계의 매뉴얼에 따른 조치다.
'심각'은 항공기 운항이 전면 중단되거나 1000명 이상의 체류객이 발생했을 때 발령된다. 덕분에 지난 2년 전 사태와는 달리 공항에서 기다리던 체류객들에게 모포와 매트리스, 생수 등이 지원됐다.

제주 공항 폭설로 결항이 이어지자 12일 오전 12시25분 공항 체류객들에게 모포를 나눠주고 있다. 최충일 기자

제주 공항 폭설로 결항이 이어지자 12일 오전 12시25분 공항 체류객들에게 모포를 나눠주고 있다. 최충일 기자

제주공항 폭설로 인한 체류객. 최충일 기자

제주공항 폭설로 인한 체류객. 최충일 기자

한국공항공사 제주지역본부에 따르면 지난 11일 공항에 대설경보가 내려진 이후 이날 오후 1시까지 결항 292편, 지연 312편 등 총 604편의 항공편이 차질을 빚었다.김도형(24·대구시 대명동)씨는 “오늘 오후 1시가 운전면허 시험인데 제시간에 가기가 어려울 것 같다"며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집에라도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주공항 폭설로 인한 체류객. 최충일 기자

제주공항 폭설로 인한 체류객. 최충일 기자

한정아(40·진주시 평리동)씨는 “엄마 넷이서 아이 여섯과 함께 추억을 남기기 위해 제주를 찾았는데 함께 공항에서 노숙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제주공항 폭설로 인한 체류객. 최충일 기자

제주공항 폭설로 인한 체류객. 최충일 기자

한편, 제주공항에서는 무더기 결항사태가 이틀째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7000여 명의 체류객을 수송하기 위한 작업이 본격화됐다. 한국공항공사 제주지역본부에 따르면 결항으로 전날 제주를 떠나지 못한 승객들 가운데 이날 출발 예정인 승객은 7047명이다.

11일 오전 제주공항 활주로에 눈보라가 치고 있다. 최충일 기자

11일 오전 제주공항 활주로에 눈보라가 치고 있다. 최충일 기자

항공사별로는 대한항공 2023명, 아시아나 항공 1157명, 제주항공 1456명, 진에어 380명, 에어부산 778명, 이스타항공 889명, 티웨이항공 364명 등이다. 운항편 수는 정기편 195편, 임시편 12편 등 총 205편이며 전체 공급 좌석은 3만993석이다. 이 가운데 7832석이 빈 좌석이어서 수치상으로 체류객 7047명을 모두 태울 수 있다.

12일 오전 1시 제주공항 무료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승객들. 최충일 기자

12일 오전 1시 제주공항 무료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승객들. 최충일 기자

제주공항은 이날 오전부터 항공기 운항이 정상화되고 있다. 김포에서 출발한 아시아나 OZ 8901편이 오전 6시59분 제주공항에 착륙한 것을 시작으로, 8시19분 티웨이항공 TW 722편이 김포로 떠나는 등 비행기 77편이 이착륙하며 평상시 모습을 되찾고 있다. 한국공항공사 제주지역본부 관계자는 "항공사들이 이날 모두 224편을 운항하고, 추가 임시편 투입 등도 하고 있어 제주에서 발이 묶인 7000여 명을 하루 동안 모두 수송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제주=최충일 기자 choi.choongil@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