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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풋볼 <2> 검은 대륙의 '풋볼 드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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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프로선수들에게도 잔디구장은 그림의 떡이다. 맨땅에서 훈련 중인 선수들의 발끝에서 쉴새없이 흙이 튀어 오른다(사진위). 고된 훈련으로 얼굴이 온통 땀에 젖은 한 선수가 휴식시간에 물을 마시고 있다. 오후 훈련은 해 질 녘에 시작되지만 덥기는 마찬가지다(아래). 아크라(가나)=박종근 기자

"아드레스, 아드레스." 가나 프로축구팀 리버티 클럽을 방문한 날, 훈련장에서 만난 한 선수는 대뜸 주소(어드레스)를 알려달라고 했다. 황당해하는 기자에게 통역은 "이곳 사람들은 처음 만난 외국인에게 주소나 전화번호를 받으면 '친구'가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한국으로 스카우트해 달라는 뜻일 것"이라고 얘기해줬다.

가나와 토고의 축구 팀을 취재하면서 기자는 수십 명으로부터 "연락처를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심지어 토고 축구의 영웅 에마뉘엘 아데바요르(아스널)의 형인 피타(토고 실업팀 축구선수)도 명함을 달라고 한 뒤 "전화하겠다"며 한국행에 강한 의지를 비췄다.

미셸 에시앙(첼시)을 배출한 리버티 구단의 클럽하우스를 찾아갔다. 이곳에는 가나 전역에서 뽑힌 18명의 10대 선수가 숙식을 하며 테스트를 받고 있었다(이들은 이 과정을 '캠핑'이라고 부른다). 숙소와 담장 사이 구석에 선수 몇 명이 쭈그리고 앉아 훈련복을 빨고 있었다. 16세인 디비디 구아마는 한국 프로축구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본 뒤 연락처를 적어줬다. 그러고는 "저를 잊지 마세요. 꼭 연락 주세요"라고 신신당부했다.

한 방에 4명이 쓰는 숙소에 들어가 봤다.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밥을 큰 양푼에 담고 '페페'라는 양념을 쓱쓱 비벼 손으로 먹는다. 반찬은 하나도 없다. 생강.마늘.고추 등을 섞어 만든 페페는 고추장 못지않게 맵다.

아프리카의 남자 아이들은 모두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하고, 축구선수는 모두 유럽 빅리그에서 뛰는 꿈을 꾼다. 에시앙과 아데바요르, 이집트의 호삼 미도(토트넘), 코트디부아르의 디디에 드로그바(첼시)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우상이다. 첼시가 에시앙을 스카우트하면서 지급한 이적료만 2600만 파운드(약 480억원)다. 아데바요르는 홈바를 갖춘 호화 주택에 살며 BMW 자동차를 세 대나 굴린다.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을 후원한 LG 이집트법인의 권혁기 법인장은 "아프리카에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다. 가난과 계급의 벽을 단번에 뛰어넘고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건 축구뿐"이라고 말했다.

네이션스컵이 열린 이집트의 각 경기장 관중석에는 유럽 프로팀 스카우트들이 모여 앉아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안정환이 뛰었던 프랑스 메츠 클럽의 스카우트는 아프리카 선수들의 장단점에 대해 "신체가 잘 발달해 있고, 스피드와 파워도 좋다. 단점은 발견하지 못했다"며 "우리가 드로그바 같은 선수를 데려올 돈이 없어서 문제"라고 말했다.

아프리카 클럽들은 유럽을 본뜬 유소년 시스템을 운영한다. 12세부터 시작해 14, 17, 19세 등 나이별로 세분화해 가르친다. 송종국이 뛰었던 페예노르트(네덜란드)는 아예 가나에 현지 사무소를 차렸다. '될성부른 떡잎'을 빨리 낚아채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선수들에게 현실은 페페만큼이나 맵다. 토고 국가대표 출신인 바타나 모테스트(26)는 "여기 실업팀에서 월급 6만 세파프랑(약 12만원)을 받는다. 일반인 평균보다는 많은 편이다. 그렇지만 언제 잘릴지 모른다. 부상이나 부진으로 선수를 그만두면 먹고살기 위해 목공이나 미장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선수들은 '풋볼 드림'을 안고 프로팀을 기웃거린다. 리버티 클럽에서 꽤 잘해 보이는 15세 선수가 있어서 코치에게 신상을 물어봤더니 "쟤는 정식 선수가 아니라 물 당번(water boy)"이라고 한다. 재정이 넉넉지 못한 프로팀에서는 가능하면 많은 선수를 해외로 보내 돈을 벌려고 한다. 리버티 클럽에서는 베트남에도 5명을 보냈다고 한다.

유럽 진출의 꿈을 이뤘다 해도 난관은 곳곳에 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에이전트의 농간으로 중도 탈락하는 경우도 많다. 인종차별과 모욕을 겪기도 한다. '돈 맛'을 알아버려 인성이 피폐해지는 경우도 있다.

아데바요르가 어린 시절 훈련을 했다는 로메의 한 해변에는 녹슨 철골만 남은 다리가 바다를 향해 뻗어 있다. 100여 년 전 프랑스 식민지 시절 노예를 동원해 지었고, 노예선이 이곳에서 출발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 해변에서 맨발의 선수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뛰고 또 뛴다. 이들은 '해방'을 꿈꾸지만, 냉혹한 유럽 자본의 '노예'로 전락할 수도 있다.

이집트.가나.토고=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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