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사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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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949년 1월5일 중앙청 205호실에 임시사무실을 두었던 반민특위가 제1차로 검거한 사람은 박흥식씨였다.
여권을 발급받아 미국으로 피신하려 준비중이라는 정보 때문에 「반민법」적용대상자중 제일먼저 잡혀봤다.
뒤를 이어 이종형, 최린, 이기용이 연행되었다. 그리고 이등부문의 수양딸 배정자와 「황국신민서사」를 지었다는 김대우도 잡혔다. 최남선과 이광수가 연행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기미년 독립만세운동당시 민족대표의 한사람이였던 최린은 친일로 변절한 후에 매일신문에 『있는 힘을 다 바치자』고 대일 충성을 다짐했었다. 독립선언서의 집필자인 육당 최남선은 『일본국민으로서의 충성과 조선남아의 의기를 발휘하여 부여된 광영의 이기회에 용약하여 한사람도 빠짐없이 출진하기를 바라는 바이다』라며 학병지원을 독려했다.
그러나 재판정에 선 춘원 이광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고 변명했다.
최남선의 이유도 역시 구차했다. 『신변의 핍박한 사정이 지조냐 학식이냐의 양자중 하나를 골라잡아야 할 때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붙잡으라 하거늘 나는 그 뜻을 뿌리치고 학업을 붙잡았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의 작??라서 변절이 불가피했을 것이란 점을 알면서도 역사는 그들을 어김없이 「변절자」로 기록했다.
그들이 평범한 사람들이었던들 그들은 지탄을 받지 않아도 괜찮았을 게다.
하지만 그들은 각기 민족의 대표적 문인이요, 독립운동의 선각자였기에 그들의 언행에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와 대의의 길을 저버리고 민족패배주의에 빠져 현실타협의 길을 선택한 책임을 벗을 수 없었다.
엊그제 일제시대 독립투사들의 수사기록과 옥중사진들이 공개되었다.
모진 고문과 옥고속의 초췌한 모습을 감출 수 없으나 그래도 형형한 눈빛과 당당한 자세가 범하기 어려운 지조를 엿보여 준다.
『논어』에는 「엄동설한이 되어서야 소나무, 측백나무의 절개를 알수 있다」(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그런 고초를 겪고 절의를 굽히지 않은 이들의 위대함은 두말할게 없다. 하지만 고난에 못이겨 지조를 굽힌 이들의 이름은 너무 아깝다.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생각하게 하는 사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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