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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글쓰기, 여성성의 상징 질서를 섬뜩한 문장으로 깬 오정희 소설서 비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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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호 26면

[CRITICISM] 한국문학 속 젠더 폭력

일러스트=강일구 ilgook@hanmail.net

일러스트=강일구 ilgook@hanmail.net

페미니즘이 한국문학을 바꾸고 있다. 2017년의 한국문학장에서 페미니즘 이슈는 강력한 것이었다. 운동의 계기들은 문학의 안과 밖 모두에서 등장했다.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불리는 사회적 문제의식이 부각되었고, ‘강남역 살인사건’의 상징성은 날카로웠다. 2016년 하반기 이후에는 문화계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해시태그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페미니즘 담론은 폭발적으로 넘쳐흘렀다.

오정희 작품의 여성들 #시선 받는 대상서 벗어나 #응시 주체로 타인 들여다봐 #데이트 폭력 다룬 강화길 #폭력의 기원 성찰한 박민정 #젊은 여성 작가들 작품 돋보여

이 물결이 젠더를 둘러싼 폭력과 차별의 구조를 드러내고 그것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한 것은 분명하지만, 사회적 소용돌이들은 다른 성찰의 과제들을 남겨 놓았다. 여성학자 김주희의 개념을 빌리면 이러한 ‘속도의 페미니즘’은 토론과 비평의 공간을 제한함으로써 페미니즘의 정치성을 약화시키고 ‘도덕’의 문제로 축소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한국사회의 환부 안에서 글쓰기의 계기를 발견해온 한국문학이 이 이슈에 첨예하게 반응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의 작가들이 ‘세월호 이후에도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의 그늘 안에 있었다. 이제 세계를 지탱하는 폭력과 차별의 구조는 ‘젠더 폭력’이라는 문제 속에서 다시 질문되어야 했다. 적지 않은 문학 작품들은 이 문제와 대면했고, 직접 다루지 않더라도 이 문제를 완전히 외면하지 못했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이 이슈는 뜨거운 전선을 만들었다.

여성문학에 강력한 영향력 드리워

하지만 이 싸움이 2016년 이후의 사회적 소용돌이 이후에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근대문학은 식민지 남성 주체성을 ‘근대적 주체성’으로 오인하는 과정 속에서 출발했다.  문학의 제도화는 남성 중심의 형식과 시스템의 구축을 의미했다. 여성이 글쓰기와 시선의 주체로 등장하기까지 한국문학사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 동안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며, 보이지 않는 투쟁은 간단없이 이어졌다. 식민지 시대의 강경애와 해방 이후 박경리 등의 빼어난 사례가 있지만, 여성적인 언어와 내적 징후들을 드러내면서 이후의 여성문학에 강력한 영향력을 드리운 것은 오정희의 소설이다.

최근 출간된 『오정희 컬렉션』(문학과지성사)은 한국여성문학의 깊은 수원지를 다시 확인하게 한다. 오정희의 소설들은 격렬한 증상을 앓고 있는 개인의 자기 변형의 과정을 보여주지만, 이것은 여성적 입문과 의례의 과정이기도 하다.

오정희의 소설 속에서 여성들은 시선의 대상이라는 자리에서 벗어나, 여성적 응시의 위치에서 타인과 자신을 들여다본다. 등단작 ‘완구점 여인’에서 어린 시절 도벽의 증상을 가졌던 ‘나’는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완구점 여인’을 ‘본다’. 완구점 여인은 여성성이 제거된 사물과 같은 결핍된 존재이지만, ‘나’는 이 여성과의 동성애적 관계를 통해 격렬한 자기 변형으로서의 여성적 의례를 치러낸다. 반면 끊임없이 아이를 낳는 계모는 증오의 대상이 된다. 다산성의 모성에 대한 혐오와 불모의 여성성에 대한 성적인 매혹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이 소설은 여성성을 둘러싼 상징질서에 균열을 낸다.

오정희의 정밀하고 섬뜩한 문장들은 어떤 익숙한 화해의 장면도 없이 강렬한 미학적 서스펜스에 다다른다. 오정희의 등단 50년은 한국여성문학사의 50년과 나란히 진행된 시간이었다. 한 후배 여성작가가 “소설의 시작은 오정희였다. 오정희를 읽지 않고 소설을 쓰는 것은 불가능했다.”(편혜영)라고 고백한 것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오정희의 50년 이후 지금, 한국문학은 수많은 여성작가를 갖게 되었다.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여성 예술가들의 약진이 가장 두드러진 영역이 문학공간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문학평론가, 교수 등의 집단과 문학 시스템에서의 남성적 우위는 여전하지만, 젊은 여성 문인들의 약진은 여성 독자들의 사회적 성장과 함께 문학이라는 매체의 특이성을 돌아보게 한다.

젊은 여성 작가들 중에서 페미니즘 이슈와 관련되어 선명한 글쓰기를 보여준 사례들이 있다. 데이트 폭력 등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룬 강화길의 소설들은 뚜렷한 전선 위에 서 있다.

강화길의 단편 ‘호수-다른 사람’ (『제8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에는 남성 연인에 의한 폭력의 문제가 등장한다. 스릴러 장르의 서사를 빌려 끔찍한 폭력에 의해 혼수상태에 빠진 친구의 진실을 찾아 나가는 이 소설에서, ‘나’는 피해자인 친구의 남자 친구와 함께 범죄의 현장인 호수를 찾아 나선다. 남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과 공포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그와의 동행은 엄청난 심리적 압박감을 동반한다. 이 기이한 동행을 독자가 따라가는 과정은 범죄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탐정 서사의 탐색 과정이지만, 폭력을 행사할지도 모르는 ‘남자와의 동행’이라는 여성적 경험의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가해자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남성적 폭력의 장면들이 중첩되고, 이 장면들은 여성 일반의 경험과 공포를 반영한다.

주인공 여성이 겪는 심리적 긴장이 절정으로 치닫는 결말에 다다르면, 범죄의 진실은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과 함께 어두운 물속으로 빠져든다. 폭력의 진상은 전모를 드러내지 않으며, 참혹한 미스터리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 해결되지 않는 미스터리야말로 탐정 서사를 배반하는 이 소설의 강력한 문학적 장치이다. ‘내’가 정확하게 가해자를 찾아낼 수 있다면, 하나의 ‘괴물’을 지목함으로써 괴물이 제거된 세상에 대한 희망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괴물은 어쩌면 도처에 있을 것이다. 가해자를 예외적인 괴물로 규정할 때 이 세계의 폭력적인 구조는 오히려 몸을 감춘다. 아마도 이미 ‘나’ 역시 이 무서운 세계에 의해 탐색하고 증언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존재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독자는 주인공조차 의심스러워지는 격렬한 혼란에 참여하게 된다. 여자의 무기력과 신경증과 혼란이야말로 그 공포와 폭력을 더욱 생생하게 하며, 날카로운 서스펜스를 유지하게 한다.

한편 젊은 작가 박민정의 소설들은 폭력의 구조를 보다 넓은 사회역사적 맥락에서 검토한다. 폭력의 장면 속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미학적 긴장 대신에, 박민정은 성찰적인 토론의 여지를 남겨 놓는 정보들을 제시한다. 소설집 『아내들의 학교』(문학동네)에 수록된 소설들은 혐오와 폭력의 기원에 대한 다층적인 문제의식의 소산이다.

박민정의 단편 ‘행복의 과학’은 일본사회의 특정 종교 집단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지금 한국사회의 혐오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종교의 폭력성에 대한 문제, 일본의 신민족주의와 ‘넷우익’들의 문제, 젠더를 둘러싼 혐오의 문제를 연결시키는 보기 드문 지형도를 그려낸다. 소설 속의 여성 편집자는 ‘행복의 과학’이라는 종교에 빠졌던 인물의 이야기를 찾아가면서 젠더와 민족 문제를 둘러싼 끔찍한 사건의 비밀을 알게 된다. 정보 탐색형 서사 구조를 가진 이 소설에서 여성 편집자가 진실을 탐구해가는 과정은, 자신의 실존적 삶 안에 도사린 국가와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대면하는 과정이다. 소설은 폭력의 역사적 기원을 성찰하면서 가부장적 도덕관념과 극우 민족주의의 강고한 고리를 끊어내는 혐오 이후의 시간을 상상하게 한다.

여성 동성 커플 사이의 폭력 다뤄

박민정의 또 다른 단편 ‘아내들의 학교’는 최근 젊은 남성 작가들이 발표하는 새로운 감수성의 ‘퀴어 서사’와 함께 젠더를 둘러싼 문제의식의 가장 날카로운 좌표에 위치한다. 이 소설의 도발적인 발상은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근미래에 여성 동성 커플들 사이에 일어나는 폭력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이다.

페미니즘 담론 안에서 여성적 연대와 ‘자매애’가 가지는 긍정적인 비전을 생각할 때 레즈비언 커플 내부의 폭력성을 문제를 드러내는 것은 문제적이다. 결혼한 뒤 아이를 입양해 살고 있는 이 동성 커플에게도 남편과 아내의 역할은 나누어져 있고, 계급을 둘러싼 편견과 혐오와 적대감은 해결되지 않는다. 여성들의 사회 내에서의 폭력을 가혹하게 그리는 것은 여성적 관계 안에의 파괴성을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페미니즘’이다. 주인공의 배우자는 모델 경연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가게 되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 커플과 아이의 방송출연을 요구한다. 이 장면은 신자유주의가 호명하는 자기 성공의 신화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동성 커플의 현실을 서늘하게 직시한다. 합법화된 동성결혼 이후에도 유토피아는 도래하지 않고 그들은 결코 해방되지 못한다. 이 소설은 연대와 해방의 진정한 조건이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묻는다. 지나치게 앞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물음은,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에 관한 가장 불편한 물음이다. 쉽게 도래할 유토피아를 믿지 않고 끝내 불편하게 물을 때, 문학은 간신히 유토피아에 가까워진다.

이광호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문학평론가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문학평론가. 고려대에서 박사(국문학)학위를 받았고 소천 비평문학상·팔봉비평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비평집으로 『익명의 사랑』과 산문집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연구서 『시선의 문학사』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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