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불가역적 표현 삭제 요청 … 당시 청와대가 거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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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의 12·28 한·일 위안부 합의는 ‘패키지 딜’이었다. ▶일본의 위안부 동원 관여와 책임 인정 ▶일본 총리의 사죄 ▶일본 정부 예산을 통한 후속조치라는 ‘3종 세트’를 얻어내는 과정에서 주고받기가 이뤄진 결과였다.

보고서로 본 2015년 합의 전말 #한국이 책임·사죄·보상 요청하자 #일본, 성노예 표현 금지 등 요구 #이병기·야치 라인 1년간 협상 #박 전 대통령 연내 타결에 의욕 #TF “책임 통감 표현 성과지만 … ” #일본의 의도에 말려들었다 결론

오태규 위안부 합의 태스크포스(TF) 위원장은 27일 “한국의 3대 요구에 일본은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불가역적(되돌릴 수 없음) 해결 확인’ 등을 요구했고, 맞교환 성격으로 합의가 타결됐다”고 말했다. 여기에 더해 일본의 요구로 한국 정부가 위안부 피해 지원 단체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해외 위안부 기림비를 앞으로도 지원하지 않으며, 사실상 성노예란 표현을 하지 않는다는 비공개 내용까지 포함되면서 균형이 깨졌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불가역적’ 한국이 넣고, 일본에 되치기=TF에 따르면 당시 한국 발표사항에 포함된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불가역적 해결 확인”이라는 문구에서 ‘불가역적’이란 단어는 한국이 일본에 제안한 것이었다. 2015년 1월 한국 외교부와 일본 외무성 간 국장급 협의에서 한국은 ▶‘도의적’ 등 수식어가 없는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 ▶이전보다 진전한 공식 사죄 ▶사죄의 불가역성 담보 ▶일본 예산을 사용한 이행 조치 실시 등을 제안했다. 다음달 협의에서 일본은 한국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최종적·불가역적 해결 확인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문제 해결 ▶국제사회에서의 비난·비판 자제 등 한국이 취할 조치를 제시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이 의도한 구도에 말려들었다는 것이 TF의 결론이었다. TF는 보고서에서 “한국은 ‘사죄의 불가역성’을 강조했는데, 합의에서는 ‘(문제)해결의 불가역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맥락이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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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외교부는 일본과의 잠정 합의 직후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이 들어갈 경우 국내적으로 반발이 예상되므로 삭제해야 한다”는 검토 의견을 청와대에 전달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불가역적의 효과는 책임 통감 및 사죄 표명을 한 일본 쪽에도 적용할 수 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TF는 밝혔다.

이병기(左), 야치 쇼타로(右). [연합뉴스]

이병기(左), 야치 쇼타로(右). [연합뉴스]

◆고비마다 이병기-야치 고위급 라인 가동=양국은 공개적으로는 2014년 4월부터 국장급 협의를 통해 위안부 문제를 논의했다. 하지만 실제 협의는 이병기 당시 대통령비서실장과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국가안전보장국(NSC) 국장 간에 이뤄진 것으로 TF는 파악했다.

이병기-야치 라인은 국장급 협의가 교착 상태를 거듭하자 2014년 말부터 가동됐다. 첫 협의는 2015년 2월 열렸고, 합의 타결 전까지 총 8차례의 공식 협의가 있었다. 이 전 실장은 처음에는 국가정보원장 신분으로, 이후에는 비서실장 신분으로 협상에 임했다. 양측은 2015년 4월 잠정 합의를 했지만 두 달 뒤인 6월 일본이 ‘군함도’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문제로 갈등이 심화하면서 협의는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그러다 그해 11월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일 정상회담이 열리면서 다시 협상의 물꼬가 트였다.

TF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연내 타결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연내’라는 데드라인을 설정하는 바람에 협상력을 제약했다고 TF는 판단했다. TF는 보고서에서 “고위급 협의는 시종일관 비밀 협상으로 진행됐다. 대통령이 소통 부족의 상황에서 조율되지 않은 지시를 함으로써 협상 관계자들의 운신 폭을 제약했고 외교부는 조연이었다”고 했다.

◆합의 전 외교부, 피해자 15차례 접촉=TF는 외교부가 2015년 한 해에만 15차례 이상 피해자 및 관련 단체를 접촉한 사실을 확인했다. TF는 “외교부는 피해자 단체를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협상 진행 중 피해자 쪽에 ‘때때로’ 관련 내용을 설명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최종적·불가역적 해결 확인’ 등의 내용을 포함해 한국 쪽이 취해야 할 조치가 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이해와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고 했다. 다만 ‘3종 세트’를 얻어낸 것 자체에 대해서는 TF도 “일본의 ‘도의적 책임 통감’보다 진전된 ‘책임 통감’이란 표현을 이끌어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연구소장은 “전체적으로 TF가 균형 잡힌 평가를 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번에 새로 밝혀진 비공개 부분이 12·28 합의를 파기하거나 뒤집을 정도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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