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아이어떡해요!] 캥거루 키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하나 아니면 둘 낳아 끔찍이 여기며 키우는 우리 아이, 중국 '소황제'보다 못할쏘냐. 하지만 그렇게 키운 아이들이 '자립도 제로', '소비성 과다', '사회 낙제생'이라면? 아이를 건강한 사회인으로 키우기 위해 부모가 할 일은 많고도 많다.

나이가 들어도 캥거루처럼 부모 품 안에서 보호받으며 산다는 '캥거루족'. 끝끝내 자립하지 못하고 부모의 노후를 갉아먹고 살아야 한다면 골칫덩이가 아닐 수 없다. 그 출발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부모가 시작한 과잉보호다. 대학생 자녀 시험 범위 물어보려고 교수한테 전화 건다는 학부모도 있을 정도니, 아이들은 자립 능력을 키울 기회조차 박탈당한 셈이다. 혹 우리 아이도 '예비 캥거루족'으로 자라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 애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

10대 자녀를 둔 한 엄마들 모임에서 요즘 애들 얘기가 화두에 올랐다.

"우리 딸(외고에 다닌단다)은 지난 기말고사 기간에 하루 내가 외출했더니 점심을 못 챙겨 먹더라고. '밥 달라'며 전화했기에 부랴부랴 동네 음식점에 전화 걸어 배달시켜 줬지."

"말도 마. 우리 아들은 중학생인데 아직도 식탁 앞에서 '엄마, 숟가락이 없어요''젓가락이 없어요'한다니까."

"요즘 애들 다 그렇지 뭐. 얼마 전에 조카가 우리 집에 와서 며칠 자고 갔는데 아침에 묻는 거야. '고모, 무슨 옷 입어요?'하고. 중학생이나 돼 가지고 옷 코디도 못하더라고."

"4학년짜리 우리 딸은 만날 '엄마, 이제 뭐해?'를 달고 살아. 내가 외출하면 전화까지 해서 '피아노 연습 다 했는데 이제 뭐해?'라고 물을 정도야. 뭘 해야할지 스스로 결정을 못 하니, 참."

내용은 아이 험담인데 표정은 그리 걱정스럽지 않다. 도리어 경쟁적으로 자기 아이의 '무능력'을 내놓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이게 흉이야 자랑이야. 아니나 다를까. 대화가 무르익자 과잉보호 옹호론이 터져나왔다.

"할 때 되면 다 하게 돼. 나도 결혼 전엔 방 정리도 제대로 못했는데 결혼하고 애 생기니까 다 하게 되더라고." "엄마한테 충분한 사랑을 받은 경험이 아이의 자존감 형성에 도움이 되지 않겠어?" "공부할 시간도 모자라는데 도와줄 수 있는 데까지 도와줘야지."

# 미숙한 아이 못 참는 엄마

전문가들은 "자기 일을 스스로 해내지 못하는 아이는 행복한 어른으로 자랄 수 없다"고 못 박아 말한다. 신철희 아동청소년상담센터 소장은 "'난 소중한 존재야'란 자존감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았을 때 생기는 건데, 부모가 매사를 못 믿어 다 해주는 아이가 어떻게 자존감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자존감은커녕 열등감으로 이어지게 마련이고, 물론 자신감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신 소장은 또 "공부 이외의 일은 모두 다른 사람이 해줘야 하는 '하찮은 일' 취급을 하던 아이는 어른이 돼서도 식사 준비, 빨래하기 등의 일상사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

전문가들은 또 "자기 일을 스스로 하는 아이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한국청소년상담원 이호준 선임연구원은 "엄마가 얼마나 잘 참아내느냐가 아이를 얼마나 자립시키느냐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옷 입기, 신발 신기, 밥 먹기 등의 신변처리부터 친구 사귀기, 시험공부 계획 짜기 등 학교생활까지 매사 아이가 스스로 해낸 결과가 엄마 욕심에 차지 않더라도 그대로 봐내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 이 선임연구원은 "자기 손으로 해봐야 혼만 나고 어차피 엄마가 다시 해줄 텐데 하는 경험이 아이의 자립심을 꺾어버린다"고 말했다.

# 자립 훈련은 만 2~3세부터

아이의 자립은 아이 스스로 "내가, 내가"를 외치는 만 2~3세부터 시작돼야 한다. 아동학자들은 이 시기를 '자율성 형성기'라고 부른다. 신혜원 서경대 아동학과 교수는 "이때 위험하고 미숙하다는 이유로 혼자 못하게 막으면 정상적인 자율성 발달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혼자 양말을 벗고, 밥을 먹는 등 신변처리부터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다려준다. 그 과정에서 칭찬과 격려도 필수. 혼자 할 수 있는 것을 차근차근 늘려가면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만들어 놓은 반찬을 냉장고에서 꺼내 혼자 밥을 차려 먹을 수 있다. <그래픽 참조>

초등학교 입학이 자립심을 꺾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본격적인 경쟁의 장에 집어넣었다는 조바심이 아이 능력을 믿지 못하고 매사를 도와주게 하는 것이다. 신 교수는 "숙제나 준비물 챙기기 등을 아이 혼자 힘으로 다 끝낸 다음에 부모가 한번 검사해주는 정도로만 관여하라"고 조언했다.

글=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 이 정도는 혼자서 !

만 2~3세

.옷 벗기: 옷 입는 것은 어렵지만 벗는 것은 충분히 할 수 있는 나이랍니다.

.양말 빨래통에 갖다 넣기: 옷은 당장 빨 것인지, 더 입고 빨 것인지 분류해야 하기 때문에 이 시기 아이들에겐 아직 어려워요.

.밥 먹기: 일단 하루 한끼부터.

.이 닦기: 마무리는 엄마가. "충치 벌레 있나 검사해 보자"면서.

만 4~6세

.밥 먹기 전에 스스로 손 씻기: 식사 준비에 참여시키는 1단계 작전.

.소변 보고 스스로 물 내리고 옷 입기: 만 6세부터는 대변 처리도 혼자 하게 하세요.

.자기 전에 잠옷 갈아입기

.식사 후 자기 밥그릇 싱크대에 갖다 놓기

초등 저학년

.알림장 보고 스스로 준비물 챙기기: 3학년부터는 준비물도 스스로 사러 가게 시키세요.

.가정통신문 엄마.아빠 책상에 갖다 놓기: 부모가 아이 책가방을 직접 뒤지는 일은 금물.

.숙제할 시간과 놀 시간 정하기: 결정은 아이에게 맡기세요.

.빨 옷은 빨래통에, 더 입을 옷은 옷걸이에 걸기

.자기 가방이나 물건, 반드시 제자리에 놓기

.엄마 지도 아래 스스로 머리 감고 샤워하기

초등 고학년

.학기 시작 전 책꽂이와 노트 정리하기: 새로 사야할 학용품도 아이가 직접 챙기도록.

.시험 대비 학습 계획표 짜기

.냉장고에 마련해둔 간식 꺼내먹기

.식사 전 식탁에 수저 놓기: 하루 한끼. 저녁식사 때 시켜보세요.

.식사 후 반찬 통 뚜껑 닫아서 냉장고에 넣기

.음식을 그릇에 덜어서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기

.어른 지도 아래 라면 끓여보기: 연습이 많이 되면 혼자서도 할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전화로 음식 주문하기: 음식을 배달받은 뒤 돈도 직접 내게 해보세요.

.계절별 옷장 정리하기: 작아진 옷, 떨어진 양말 등을 골라내게 하세요.

※도움말=신혜원 서경대 아동학과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