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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분단·전쟁·독재 … ‘역사의 그늘’ 누구 탓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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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953년 한국전쟁 정전 협정에 서명하는 북한의 김일성左
1948년 정부 수립 경축식에 참가한 미 육군 태평양 총사령관 맥아더左와 초대 대통령 이승만.

분단과 독재에 대한 논의는 오랫동안 정부에 의해서 금지돼 왔다. 한국 현대사 연구는 1970년대까지 국책기관을 제외하고는 연구조차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옛 소련과 북한의 ‘적화야욕’만이 연구 대상이었다. 1980년대 민주화 이후 현대사 연구가 본격화될 수 있었기 때문에 초창기의 연구란 논의조차 못했던 현대사의 복원작업이자 민주화의 과정이기도 했다. 전 고려대 강만길 교수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창비)은 민주주의와 함께 분단에 대한 정면에서의 문제제기였고, 이후 학계 연구는 자연스럽게 민족주의 관점이 주류를 형성했다.

본격적인 현대사 연구는 역시 『해방전후사의 인식』시리즈 전6권(한길사)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그 중심에는 미 시카고대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일월서각)번역 출간이었다. 커밍스는 베트남 반전운동의 영향 아래 공개된 미군정 문서를 중심으로 미국이 한반도 분단은 물론 신탁통치안을 먼저 제기했다는 점을 주장했다. 그의 방대한 실증 연구가 연구자들에게 준 충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커밍스가 주로 미국을 통해 분단과 전쟁의 원인을 찾고자 했다면, 고(故) 김남식씨의 『남로당 연구』(돌베개)와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의『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은 국내 정치세력의 ‘잘못된’ 정치노선에서 분단원인을 찾으려했다. 이후 창원대 도진순, 서울대 정용욱 교수 등의 연구는 미국·우익세력 연합에 의해 민족분단이 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최근 출간된 목포대 정병준 교수의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은 이러한 연구경향의 종합판인 셈이다.

그러나 옛 소련이 몰락하고, 스탈린 치하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커밍스의 영향을 받은 수정주의 연구 경향에 대한 비판이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연세대 박명림 교수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나남출판)은 그 신호탄. 분단 책임은 미국이 아니라 1945년부터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북한 정권 수립에 적극 나섰던 소련에게 더 많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북한의 토지개혁을 비판적으로 연구한 연세대 김성보 교수의 『남북한 경제구조의 기원과 전개』(역사비평사)를 통해 뒷받침됐다.

한국전쟁의 원인과 책임 문제 역시 두 경향 사이에서 논쟁이 진행 중이다. 커밍스는 미국이 1945년 이후 한국에서 조성된 혁명적 상황을 억압했고, 그것이 곧 전쟁을 야기했다고 주장했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이 아니라, 남과 북에서 단정이 수립되면서 시작된 내전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박명림은 소련·북한의 적극적인 전쟁 공모를 밝혀냈고, 성신여대 김영호 교수는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두레)에서 스탈린의 정책을 더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현대사를 둘러싼 논쟁은 분단·한국전쟁으로 시작됐지만, 최근 박정희 시대 평가문제로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다. 이전 논쟁이 박정희 시대의 독재체제·정경유착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진보학계)와, 경제성장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보수학계)사이의 대립 구도였다면, 최근에는 새 국면으로 전개되고 있다. ‘개발국가 이론’을 둘러싼 논쟁이 그것이다.

이 논쟁은 효율적 경제성장을 위해 강압체제가 불가피하다는 개발국가이론을 통해 박정희 시기의 사회체제가 한국만의 특수성이 아니라 경제성장 초기 단계의 보편적 현상이었다는 주장에 의해서 촉발됐다. 식민지 총독부의 경제정책 분석을 통해 박정희 시대의 기원을 찾고자 한 하버드대 카터 에컬트 교수의 『Offspring of Empire』(제국의 후예, 워싱턴 주립대 출판사)와 1970년대 국가·재벌의 역할을 분석한 MIT대학의 엘리스 암스덴 교수의 『아시아의 다음 거인』(시사영어사)은 개발국가 이론 도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하나의 논쟁은 박정희 시대 독재의 책임과 관련하여 진행 중이다. 이 논쟁은 독재의 책임이 ‘그 때 그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를 지지했던 국민들의 암묵적 승인에도 있다는 한양대 임지현 교수가 엮은 『대중독재』(책세상)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는 국민 지지를 얻어내는 과정도 독재정권의 책임이라고 반박한다.

이 논쟁은 계간 ‘역사비평’을 통해서 진행되었는데, 경제성장과 관련된 논쟁이 진보·보수 사이에 전개되었다면, 대중독재 논쟁은 진보학계 내부 논쟁이이다. 어쨌거나 박정희 시대 재평가는 그 전사(前史)인 이승만 시대 평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1950년대에 대한 초기 연구는『1950년대의 인식』(한길사)과 조봉암에 초점을 맞춘 연구를 통해 비판적인 인식이 주류. 그러나 한국의 경제성장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1950년대를 경제성장의 서곡으로 보는 연구들이 나타났다.

이승만 정부 시기의 경제정책에 대해 접근한 노스웨스턴대 우정은(커밍스의 부인) 교수의 『Race to Swift』(속도를 위한 경쟁, 컬럼비아대 출판부)”가 그 맨 앞 줄에 서 있다. 이와 함께 미국의 대한정책 변화로부터 1950년대를 조명한 일본 릿쿄대 이종원 교수의 『동아시아 냉전과 한미일관계』(일본어판, 동경대 출판부)는 1950년대 재인식을 위한 출발점이었다. 국내에서 성균관대 김일영 교수의 『건국과 부국』(생각의나무)은 단정론을 주장한 이승만의 현실주의 노선을 높이 평가하는 반면, 서중석 교수의 『진보당과 1950년대』(역사비평사)를 비롯한 일련의 연구는 이승만 시대의 문제점을 심층 분석하고 있다.

이상 한국현대사를 둘러싼 논쟁은 최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출간으로 다시 한번 대중 속으로 다가서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이 학문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자못 우려스럽다. 동국대 강정구 교수를 둘러싼 논쟁에서 드러나듯 최근 한국현대사를 둘러싼 논쟁은 학문 영역보다는 사회·정치 영역에서 주로 제기되고 있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책세상) 역시 이러한 지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만약 현재의 논쟁이 엄밀한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 지속된다면, 앞으로의 현대사 연구에 어떠한 의미있는 지적 충격도 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커밍스 연구가 많은 한계에도 충격을 줬던 것도 시대적 요구라는 측면과 함께 엄청난 자료 발굴과 검증 때문이었다. 또한 최근 제기되고 있는 역사관에 대한 검증도 필요하다. 한편에서는 세계사적 보편성 하에서의 진보를 주장하면서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폐쇄적 민족주의를 비판하면서 박정희의 국가주의를 긍정하고 있다.

또한 식민지 근대화론과 일본의 왜곡된 교과서를 비판하면서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근거로 역사를 또 다르게 해석하는 현상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 현대사 연구는 시작한 지 20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연구가 더 진행돼야할 부분이 많고, 새롭게 발굴되어야 할 자료도 적지 않다. 최근 나타나고 있는 사회사·생활사 연구와 구술사(口述史) 연구 등을 통해 보다 발전된 학술 연구에 기반한 현대사 논쟁이 진행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박태균 교수 서울대 국제대학원·현대사

낡은 이데올로기 잣대 들이대지 마라

즈음의 현대사 논란을 보면서 일제 관학파(官學派)의 민족사학에 대한 비판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맹목의 형식으로 역사성을 무시하는 만용이었다. 한국 현대사에 대해 처음 입을 열던 1980년대는 탄압을 무릅쓰고 논의를 시작했다는 데 더 의의가 있다. 그 기초 위에 수많은 연구업적들이 가능했고 현재 좌우 시각을 막론하고 다양한 성과들이 쏟아지고 있다. 80년대 수준에 비해 오늘의 연구수준은 엄청나게 향상했다.

그런 상황인데도 몇 편의 논문으로 학계의 인식체계를 바꾸겠다는 것은 적어도 인문학 세계에서는 유치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에는 권력의 힘으로 그런 일도 가능했다. 지금은 보수언론이 떠받치고 있지만 학계의 수준은 이미 그 단계를 뛰어 넘은지 오래다. 80년대 황무지에서 비판적 한국학을 일구어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우익이던 신우익이던 생뚱맞게 80년대 성과들을 이데올로기 잣대로 공격하고 학문을 정치 문제화 하고 있다. 보수세력은 냉전시대의 북한과 같은 편리한 공격목표를 만들어 내는 일에 집착하는 것 같다. 그들의 화두가 옛날에는 북한의 적화야욕이었다면 지금은 북한의 시대착오적 퇴행성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북한공격이 만능의 무기였던 시대와는 다르다.

진보학계를 상대로 발언하려면 최근까지 축적된 성과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하필 태동기의 업적을 대상으로 시비를 걸어야 하는지 납득되지 않는다. 진보학계가 20, 30년 전 상태에 박제된 체로 머물러 있다고 전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연구는 새로운 시각이나 해석을 전제로 한다. 또는 새로운 자료들이 추가돼 보완하는 것이다. 진보학계가 권력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하게 된 것도 바로 새로운 해석과 시각 때문이었다.

이는 보수학계가 반공 냉전의 체계를 오늘날에도 금과옥조로 활용하려는 것과는 다르다. 역사의 발전을 전제로 학문세계 또한 끊임없이 자기시각을 교정하면서 시대변화에 조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시대착오인 것이다. 진보학계는 기득권층과 지배층을 비판한다. 하지만 우익들은 자신들에게 도전해오는 자들을 공격하고 매도한다. 보수세력은 도전을 수용하지 못한다. 그러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보수학계의 주류 정통성은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인식이 학문의 이데올로기화.정치화를 추동시킨 것 같다.

안병욱 교수 가톨릭대·국사학

학자가 펜 대신 칼 들고 설쳐서야

1980 년대 전후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이른바 한국현대사 연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시피 했다. 해방이나 분단, 대한민국 건국, 한국전쟁 등의 사안을 학문적으로 접근하고 분석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 금기였던 까닭이다. 이 점에 관련해 당시 권위주의 정치체제와 주류 학계의 직무유기는 지탄을 면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현대사 연구는 '광주'를 정점으로 하는 1980년대 상황에서 출현했다.

한국사회의 농축된 모순과 갈등의 원죄 시기로 다름 아닌 해방공간 3년(1945~48년)을 지목하면서 폭발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내부 요인도 있었고 외부 자극도 있었다. 전자는 한길사의 '해방전후사의 인식'(이하 '인식') 출간(79년), 후자는 수정주의적 한국현대사 해석을 담은 미국 연구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86년)번역 발간이었다. 좌파 민족주의와 수정주의 이론은 한동안 현대사 연구를 선도하고 압도했다.

1990년대에 들어와 한국현대사 연구는 제3의 물결을 맞이했다. 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정세변화의 탓이라기보다는 연구수준의 향상과 사료(史料)의 공급확대에 따른 학문적 발전이라고 나는 본다. 그 결과 분단의 책임은 미국보다 소련이 더 컸고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 선 쪽도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라는 해석이 우세했다. 한국전쟁에 내전의 성격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쟁의 본질은 역시 국제전이라는 해석도 우세했다. 때문에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은 1990년대 이후 학계가 축적해온 학문적 축적일 뿐이다.

반대로 80년대식 한국현대사 연구의 '추락'은 무엇보다 특정사관으로의 경사 때문이다. 민족주의가 지상의 가치로 숭상되고, 좌파이념과 운동사적 접근이 업계의 미덕으로 군림하는 한 역사는 실증.객관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난다. 가공.염원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역사전개에서 다양하게 열려진 개연성과 경로들, 그리고 역사에 참여하는 개인들의 복합적 정체성을 외면한 결과다. 이는 '국사학'은 있으나 '역사학'은 보이지 않는 우리 학계의 현실과 무관치 않다.

역사논쟁이든 역사전쟁이든 이견과 반론은 어디까지나 학문의 테두리 안에서 새로운 분석시각이나, 신뢰할 수 있는 대안적 자료의 출현에 의거해야 한다. '재인식'의 정당성도 당연히 바로 이 대목에서만 주장될 따름이다. 따라서 정작 염려스러운 것은 '인식'을 주도했거나 그것에 공감하는 일부 국사학자들의 손에 과거사 정리라는 명분으로 펜 대신 칼이 들려 있는 정치적 현실이다.

전상인 교수 서울대 국제대학원·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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