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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제주 해군기지 구상권 소송 철회…불법행위 면죄부 비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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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 제주해군기지 앞에서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천주교 생명평화미사가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12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 제주해군기지 앞에서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천주교 생명평화미사가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제주 해군기지 공사를 불법시위로 방해한 강정마을 주민과 시민단체를 상대로 낸 34억 5000만원의 구상권 청구 소송을 그만두기로 했다. 구상권 소송은 채무를 먼저 갚은 측이 채무의 원인 제공자에게 그 책임만큼의 돈을 청구하는 소송이다.

정부는 12일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같이 결정했다. 법원의 강제조정안을 수용하는 형식이다. 앞서 제주 해군기지 구상권 소송을 맡은 서울 중앙지법 민사합의14부는 지난달 30일 “원고(정부)는 소를 모두 취하하고, 원고와 피고(주민·시민단체)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공사와 관련한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강제조정안을 내놨다. 주민과 시민단체도 강제조정안을 받아들이면 정부의 구상권 청구 소송은 바로 취하된다.

이로써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6월 28일 강정마을이 해군기지 부지로 확정된 뒤 불거진 주민과의 분쟁이 10년 여 갈등 끝에 매듭지어지는 모양새가 됐다.

그러나 정부 결정을 둘러싼 적절성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정부의 구상권 청구 대상은 개인 116명과 5개 단체다. 개인 가운데 강정마을 주민은 31명인 것으로 국방부는 파악했다. 5개 단체는 ‘강정마을회’,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 ‘개척자들’, ‘제주참여환경연대’, ‘생명평화결사’ 등이다. 이중 평통사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배치 반대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반대 시위를 주도한 단체다.

국방부와 해군은 당초 소 취하의 대가로 주민과 시민단체의 사과와 공사 방해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강제조정안에는 “원·피고는 상호간에 화합과 상생을 위해 노력한다”고만 돼 있다.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하고도 돈도 못 받아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게다가 정부 손실은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이번 구상권 청구는 삼성물산이 공사가 늦어져 본 손실 275억원을 정부가 방위력개선비로 물어준 뒤 지난해 3월 제기했다. 275억원 중 34억 5000만원이 이들이 125일간 벌였던 불법 시위 때문에 발생했다고 본 것이다. 다른 시공사인 포스코건설·대림건설도 정부를 상대로 공사 지연에 따른 손해를 청구하거나 중재를 요청한 상태다. 이날 결정으로 정부는 관련 소송·중재 결과에 따라 건설사에게 막대한 돈을 물어주게 되더라도, 주민·시민단체들에게 일부라도 받아낼 수 없게 됐다.

지난해 2월 26일 제주해군기지(제주민군복합관광미항) 준공식이 열렸다. 당시 상륙함인 독도함(1만4500t, 왼쪽)과 한국형 구축함인 왕건함(4400t)이 정박했다. [사진 해군]

지난해 2월 26일 제주해군기지(제주민군복합관광미항) 준공식이 열렸다. 당시 상륙함인 독도함(1만4500t, 왼쪽)과 한국형 구축함인 왕건함(4400t)이 정박했다. [사진 해군]

당장 ‘정부가 불법 시위에 면죄부를 준다’는 비판이 나온 까닭이다. 서정욱 변호사는 “국민의 세금을 운용하는 정부가 구상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직무유기이자 국고손실을 방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구상권 소송 포기로 받아내지 못하게 된 34억 5000만원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별도 대책이 마련된다. 구체적 내용을 말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결국 정부 예산, 즉 세금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제원 자유한국당 수석대변인은 “불법 전문시위꾼들에게 면죄부를 주어 계속 불법시위를 하도록 용인하는 것”이라며 결정 취소를 요구했다.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 법원의 결정이란 걸 부각하며 “정부가 자진해서 취하하면 배임죄를 지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한 꼼수로 법원의 강제조정을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다. 꼼수를 부리는 정부나, 불법시위에 면죄부를 주는 법원이나,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들기는 마찬가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5년 12월 22일 제주 기지를 모항으로 삼고 있는 제7기동전단 현판식. [사진 해군]

2015년 12월 22일 제주 기지를 모항으로 삼고 있는 제7기동전단 현판식. [사진 해군]

정부는 이에 대해 “구상권 철회를 촉구하는 국회의원과 제주도지사, 지역사회의 의견을 고려했다”며 “사법부의 중립적 조정 의견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선은 결국 청와대로 향한다. 구상권 청구 소송 철회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대선 당시인 지난 4월 18일 제주 유세에서 “소송을 철회하고 처벌 대상자는 사면하겠다”고 약속했다. 법원의 결정도 결국도 정부의 뜻이 반영된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부장 판사 출신의 변호사는 “강제조정안은 판사가 임의로 결정하지 않고 원·피고의 의견을 반영한다”며 “구상권 소송 취하에 대해 원고인 정부가 사전 동의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소극적이었을 것이란 얘기다.

청와대는 그동안 구상권 청구 철회에 대해서 “법원이 판단할 사안으로 정부는 개입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청와대가 실제 ‘보이지 않는 손’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제주도의회 의장을 지낸 문대림 청와대 제도개선비서관은 “강정마을 문제도 공식적으로 민원으로 접수된 사안”이라며 “갈등 해결 조정 차원에서 들여다봤다”고 말했다. 내년 지방 선거에서 그의 제주지사 출마설이 들린다.

향후 문 대통령의 공약에 따라 제주 해군기지 불법행위 사법처리 대상자에 대한 사면이 이뤄질 가능성이 커졌다. 지난해 6월 현재 제주 해군기지에 대한 불법행위로 모두 601명이 기소됐고, 이 중 57명이 구속됐다. 문 대통령은 지난 8일 종교 지도자 초청 오찬 간담회에서 “사면을 한다면 서민·민생 중심으로 해서 국민 통합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통합을 이유로 구상권을 포기한 정부로선 국민통합을 이유로 사면을 마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강정마을회는 12일 “정부가 해군기지 건설과 관련한 구상권 청구 철회를 위한 법원의 조정 결정을 수용한 것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주민들은 “정부의 이번 결정이 마을 공동체 회복과 제주도의 해군기지 사업과 관련한 진상조사가 제대로 추진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일각에선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해온 주민들의 응어리를 풀기 위한 명예회복과 진상조사도 필요하다”고 했다.

이철재·위문희·김선미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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