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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 ‘트럭섬’에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26명 첫 확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1946년 1월 작성된 미군의 트럭섬 전투일지에서 발견된 사진. 일본의 패망으로 트럭섬을 떠나기 위해 짐을 싸는 가운데의 젊은 여성이 이복순 할머니로 확인됐다. 왼쪽 아래는 생전의 이 할머니. 그가 만 17세이던 1943년에 위안부로 끌려간 트럭섬은 제주도 남동쪽 약 4000㎞ 지점에 있다. [사진 서울시]

1946년 1월 작성된 미군의 트럭섬 전투일지에서 발견된 사진. 일본의 패망으로 트럭섬을 떠나기 위해 짐을 싸는 가운데의 젊은 여성이 이복순 할머니로 확인됐다. 왼쪽 아래는 생전의 이 할머니. 그가 만 17세이던 1943년에 위안부로 끌려간 트럭섬은 제주도 남동쪽 약 4000㎞ 지점에 있다. [사진 서울시]

1926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복순(2008년 작고) 할머니는 만 17세이던 43년 남태평양의 섬에 갔다. 재봉공장에서 일하다가 “비싼 값에 재봉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 비극이 됐다. 그 거짓말 때문에 할머니는 20세가 되던 해까지 4년간 고향에서 4000㎞ 떨어진 외딴섬에서 위안부의 삶을 살았다. 할머니는 일본 패망 후인 46년 이키노호를 타고 도쿄를 거쳐 부산으로 귀국했다. 정부에 위안부 피해를 신고한 것은 그로부터 47년 뒤인 93년이었다. 이 할머니가 2008년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할머니의 위안부 피해는 공식 기록으로는 확인된 적이 없었다.

서울시·서울대 연구팀 사료 발굴 #2차 대전 일본 해군함대 주요 기지 #귀환선 명부 속 ‘히토가와 후쿠준’ #이복순 할머니 일본명임을 밝혀내 #정부 239명 인정, 학계는 20만 추산 #피해 규모 파악 못할 만큼 연구 더뎌

11일 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는 고 이복순 할머니의 피해를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사료를 공개했다. 이들의 연구로 남태평양에서 꽃다운 나이에 희생당한 이 할머니의 삶의 흔적이 드러났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6시간 거리에 위치한 남태평양의 ‘트럭섬(Chuuk Islands)’은 제2차 세계대전 일본 해군 함대의 주요 기지였다. ‘추크’라는 원래의 지명을 일본군이 ‘토라쿠’라고 부르면서 한국에는 ‘트럭섬’으로 알려졌다.

연구팀은 당시 미군이 작성한 전투일지, 조선인 위안부들이 귀환 당시 탑승했던 호위함(이키노호)의 승선인 명부, 조선인들의 귀환에 대해 다룬 뉴욕타임스 기사 등을 발굴해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 26명의 실체를 처음으로 찾아냈다. 박정애 연구팀장은 “정부가 인정하는 위안부 피해자는 239명이지만 학계에선 그 800배인 최대 20만 명으로 추산한다”며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정확한 피해 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할 만큼 관련 연구가 더디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46년 3월 2일자 뉴욕타임스 기사 ‘트럭의 일본인들은 포로가 아니다(Japanese On Truk Are Not Prisoners)’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복순 할머니 이동경로

이복순 할머니 이동경로

“트럭섬 사령관인 해병 준장 로버트 블레이크에 의해 조선인과 27명의 조선인 위안부들(Comfort Girls)이 보내졌다. 블레이크 장군에 따르면 이 여성들은 남아서 미국인을 위해 일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다른 조선인들이 일본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바다에 빠뜨릴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연구팀은 당시 기사는 어린이 한 명을 위안부에 더 포함해 27이라고 숫자를 적었다고 설명했다. 이키노호 승선 명부에 적힌 위안부 피해자 26명의 이름은 창씨개명된 일본식 이름이었다. 명부에 포함된 이름 중 대구에 주소지를 둔 ‘히토가와 후쿠준’은 ‘복순’의 일본식 발음이었다. 사진에 찍힌 트럭섬의 위안부 중 한 명이 이 할머니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지난 7월 위안부 영상을 최초로 발굴한 연구팀은 트럭섬의 위안부에 대한 사료를 찾아내는 성과를 냈지만 향후 연구 예산을 걱정하는 처지다. 2015년 한·일 외교부 장관이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해결’을 선언하면서 여성가족부의 지원이 끊겼기 때문이다. 서울시의 지원을 받은 연구는 시한이 내년까지다. 박 팀장은 “현재의 위안부 관련 연구는 개별 연구자들의 임시 프로젝트 모임에 가깝다. 외교 논리에 휩쓸리지 않는 장기 연구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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