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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지자제 실시 약속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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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야당통합과 국회의원총선거에 밀려 지방자치제 재실시 약속이 실종상태다.
87년 상반기 중에 지자제를 시행한다던 84년 말 11대국회의 여야합의는 개헌과 대통령선거 와중에서 슬그머니 1년 뒤로 밀려났다. 집권당은 88년5월에 기초단체인 시-군-구 의회선거를 하겠다고 공약했고 야당은 그뿐 아니라 광역단체인 특별시-직할시-도의회와 자치 단체장까지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권당 주장처럼 단계적이든, 야당주장처럼 전면적이든 5월에 지자제선거를 하려면 지금쯤은 모든 준비가 끝나 있어야한다. 그런데 준비는 커녕 지방자치법 개정 논의조차 사라져버렸다.
여당도 말이 없고, 야당도 말이 없다. 전통적으로 지자제에 소극적인 집권당은 그렇다 하더라도 기회 있을 때마다 지방자치를 노래 삼던 야당마저 입을 다물고 있으니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시대정신이 민주화라고 한다면 민주정치를 체질화시키는데 지방자치 만한 것이 없다.
여야 할 것 없이 지금의 우리정치는 권위주의 체질에 절어 있다. 조직도, 공천도, 의사결정도 모두 위에서 정해져 아래로 내리는 하향일변도다. 조직원의 목소리는 없고 지도자의소리만 우렁차다.
이러한 권위주의 체질이 민주화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위만 우뚝하고 아래는 허약한 구조에서 저변의 소리를 수렴한다는 다짐만으로 권위주의 체질이 과연 바뀌겠는가.
풀뿌리에서부터 민주훈련이 되어 기반이 튼튼해져야만 위로 올라갈 만한 것이 저변에 축적된다. 지방자치는 국민들의 민주정치 훈련장일 뿐 아니라 정당의지역기반도 튼튼하게 해준다.
지방자치를 풀뿌리의 민주정치(Grassroots Democracy)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렇기 때문에 5·16후 권위주의적인 정치세력은 지자제를 중단시켰고, 지자제의 중단은 우리정치의 권위주의화를 가속시켰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자제 재실시 합의는 우리나라 민주화의 한싹이었다. 그러나 국회의원선거법 개정작업이 지금처럼 지지부진해서는 지방자치법은 개정은 고사하고 아예 여야협상조차 들어가지 못할 것 같다. 지방자치법 개정이 논의조차 안되는 것을 보면 여야정당들이 깔고 뭉개다가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지자제실시를 미루려는게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든다.
혹시 사정이 그렇게 늦출 수밖에 없으면 불가피한 연기 이유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실시하겠다는 분명한 프로그램을 내놓아 국민을 납득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그 어떤 경우라도 지자제 실시 여건이 안됐다든지, 시기상조라든지 하는 식의 핑계를 대서는 안될 것이다.
지자제시행 중단상태가 하도 오래 되다보니 30대 이하 국민들에겐 우리 나라가 지방자치를 실시한 기억이 아예 없거나 희미해져버렸지만 실상 우리는 10년 가까운 지자제 경험을 갖고 있다. 6·25전쟁중인 1952년 전쟁터가 아니었던 7개도 의회와 시-읍-면 의회가 선거로 구성된 것이 시작이다.
56년에는 서울시와 모든 도로 의회구성이 확대됐고, 당시의 기초 지방자치단체였던 시-읍-면의 장도 선거로 뽑았다. 자유당정권의 권위주의화에 따라 몇 년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임명제로 일시 후퇴한 적도 있다. 그러나 60년 4·19후 서울시장과 도지사를 포함한 모든 지방자치단체장까지 주민이 직접 뽑는 완전한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전쟁 중이던 36년 전에도 실시했던 지방자치를 선진국의 문턱에 와있다는 이 시점에서 여건이 됐느니 안됐느니, 시기가 빠르니 늦으니 하는건 우스광스러울 뿐이다. 그렇다고 당시의 지자제 전면 실시에 문제점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선거운동의 과열, 혈연·지연위주의 투표성향이 나타났고 공무원인사·지방공사 관여 등의 부조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주민의 견제가 없는 자의적인 정책운용으로 인한 낭비나 국민불만에 비하면 별로 심각한 것이 아니다.
이런 일부 부작용을 훨씬 뛰어넘는 이 제도의 장점에 비추어 지자제실시는 빠르면 빠를수록, 시행폭이 넓으면 넓을수록 바람직하다. 기초·광역자치단체 가릴 것 없이 지방의회와 자치단체장을 모두 주민선거로 구성하는 전면실시가 원칙이다.
부작용의 최소화를 위해 당분간 단계적 실시가 불가피할 경우라도 그 시작은 국민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 개방적이고, 가까운 장래에 전면실시를 담보하는 구체적 프로그램이 함께 제시돼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단계적 실시라는 집권당의 기본구상까지는 몰라도 우선 기초단체인 시-군-구 의회선거만을 하겠다는 데는 찬동할 수 없다.
단계적으로 할 경우라도 2단계로 나눠 첫 단계에서 적어도 반 정도는 시행하는 적극성을 보여야한다. 예컨대 기초·광역 자치단체 가릴 것 없이 지방의회를 전면적으로 구성하든지, 기초·광역단체 중 어느 한쪽의 의회와 단체장선거를 모두 실시하든지 하는 것이다.
지자제는 우리 나라 민주화 의한 이정표다. 지금 같이 무관심해서 좋을 일도, 어물어물 넘길 일도 아니다. 5월 지자제 시행 약속을 지킬 것인지, 못 지킬 것인지, 또 어떤 모양으로 시행해 나갈 것인지를 정치인들은 국민 앞에 분명히 하고 동의를 구해야 할 것이다. <편집국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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