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의 한국 조세피난처 지정 … 경위도 모르는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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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6일 원화가치가 전날보다 7.9원 하락한 달러당 1093.7원에 마감했다. 꾸준히 이어지던 원화 강세 흐름이 한풀 꺾인 것으로 전날 유럽연합(EU)이 한국을 ‘조세분야 비협조적 지역(non-cooperative tax jurisdiction)’에 포함시킨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조세분야 비협조적 지역은 사실상 ‘조세피난처’를 의미한다.

기재부 “주권 침해” 반발하지만 #1년 조사할 동안 대처 미흡 지적

5일 EU는 브뤼셀에서 28개 회원국 재무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재정경제이사회를 열고, 한국을 포함한 조세분야 비협조적 지역 17개국 명단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대외경제장관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어제(5일) EU에 공식적으로 설명하는 서한을 보냈다”며 “다른 국제 규범이나 기준에 의하면 우리가 전혀 문제가 없어서 적절히 대처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EU는 지난해 말 조세분야 비협조적 지역 후보 92개국을 선정한 뒤 대상국가를 압축해왔다. EU는 17개국 외에 향후 문제가 되는 세법 개정을 약속한 47개국에 대해서는 이보다 한 단계 낮은 ‘회색리스트’로 분류했다.

조세분야 비협조적 지역은 최근까지 조세피난처로 불렸다. 그러나 국가 간 조세 정보교환이 활발해지고, 제도 개선을 약속하는 경우가 늘면서 용어를 순화하고, 별도의 명단도 작성하지 않는 추세다.

그러나 EU가 갑자기 명단을 확정해 발표하면서 정부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EU는 한국이 외국인 투자지역과 경제자유구역 등에 투자하는 외국 기업에 소득세·법인세 등 감면 혜택을 주고, 제도의 투명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보통 ▶저율과세·무과세, 국내와 국제거래에 차별적 조세혜택 제공한 경우 ▶해당 제도의 투명성 부족 ▶해당 제도에 대한 효과적 정보교환 부족 중 하나에 해당하면 유해조세제도(preferential tax regime)라고 본다. 아직 EU가 이 명단에 속한 17개 국가에 대해 어떤 제재를 할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기재부는 EU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조세 회피에 대한 국제공조 프로그램(BEPS)과는 다른 기준을 적용해 국제 기준을 어겼다는 입장이다. BEPS 프로젝트는 적용 대상을 금융·서비스업 등 이동성 높은 분야로 한정하지만 EU는 적용 범위를 제조업까지 확대해 한국을 명단에 포함했다.

안택순 기재부 조세총괄정책관은 “올 9월 BEPS 이행 평가에서 한국의 외국인 투자지원제도는 유해조세제도가 아니라고 판단했다”며 “당시 EU도 이런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는데 약속을 어기고 별도 명단을 발표한 것”이라고 말했다.

기재부는 EU 회원국이 아닌 국가에 EU 자체기준을 강요하는 것은 조세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란 입장이다.

당장 큰 피해가 없더라도 체면은 이미 구겼다. EU가 발표한 명단엔 한국을 비롯해 파나마·튀니지·아랍에미리트(UAE)·바베이도스·카보베르데·그레나다·마카오·마셜제도·팔라우·세인트루시아·사모아·바레인·괌·몽골·나미비아·토바고 등이 포함됐다. OECD 회원국 중엔 한국이 유일하다.

EU의 조사가 1년 가까이 진행됐는데 정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기재부는 비슷한 수준의 나라가 모두 빠진 가운데 한국만 포함된 이유에 대해 명쾌한 해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안 정책관은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고,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며 “다른 나라에선 어떤 제도가 문제가 됐고, 어떤 제도 개선을 약속했는지도 정보가 없다”고 말했다.

세종=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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