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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건물로 남은 악양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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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후난(湖南)성의 자그마한 도시 웨양(岳陽)에 있는 악양루를 찾은 것은 범중엄의 고매한 향취를 맡고 싶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망이 컸다. 악양루는 여전히 양쯔(揚子) 강가에 서 있었지만 내가 그리던 모습이 아니었다. 콘크리트로 세워진 건물에선 세월의 때를 찾아 볼 수 없었다. 물론 송대에 지어진 건물 그대로가 남아 있으리라는 기대까지 한 것은 아니지만 이거야 너무 심하지 않은가. 악양루의 이름만 빌렸을 뿐 전혀 새로운 현대 건축물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이라도 해주듯이 설계를 한 사람의 이름까지도 밝혀놨다. 이 현대 건축물 안에 들어가서 나는 다시 한번 놀랐다. 거기에는 당.송.원.명.청 등 각 시대의 악양루 미니어처를 만들어 전시해 놓고 있었다. 이것은 현대 건축물 악양루가 옛 이름을 도용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옛날에도 그랬으며 오늘날에도 오늘의 악양루를 지을 수 있는, 따라서 시대마다 그 시대의 악양루가 있다는 당당한 주장인 것이다.

이런 예는 비단 악양루뿐이 아니다. 최호(崔顥)의 시를 통해 그리운 마음으로 찾아간 우한(武漢)의 황학루(黃鶴樓)나, 왕발(王勃)의 '등왕각서(騰王閣序)'로 알게 된 난창(南昌)의 등왕각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아니 중국의 문화재 정책에는 원형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 같다. 있다면 현대를 포함한 특정 시대의 유적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한 복원(復原)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베이징(北京)의 고궁에서는 옛 건물을 이용해 전시회를 하고 만리장성은 우리 눈에는 원형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는 보수 작업이 계속된다. 어느 곳이든 관광객이 유적지 안까지 들어가 마음껏 구경 할 수 있다. 이것이 어찌 중국만의 현상이랴. 유럽에 가면 오래된 고성의 내부를 개조해 여행객들의 숙소로 쓰기도 한다.

우리의 문화재 정책은 원형의 보존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일단 문화재로 지정되면 제일 먼저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손을 대지 못한다. 그것은 소수의 권력자나 연구자 말고는 우리의 삶과는 전혀 무관한, 그저 옛날부터 있어 온 구조물에 불과하다. 화석이다. 이 화석은 구경을 하고 나면 항상 아쉬움이 남고 수박 겉핥기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고등학교 시절 경주에 수학여행을 가서 나는 이제는 누릴 수 없는 호사를 누렸다. 무엄하게도 지금은 밟아볼 수 없는 청운교 백운교에 앉아 사진을 찍은 것이다. 내가 밟아 청운교 돌계단이 얼마나 닳았을까.

원형의 보존도 좋다. 그러나 천년 전에 깎아 놓은 돌계단의 날카로운 각이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된 것이 무슨 의미인가. 천년 전에 만들어진 것답게 사람들이 디디고 다녀 모서리가 닳아져 시간이 흘러간 증거가 묻어 있는 문화재야말로 우리 삶과 밀착된 문화 유적이 아닐까. 과학 기술이 더 좋아져 만의 하나 사람의 시선만으로도 유물이 닳는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그때는 보는 것도 못하게 해야 할 것인가. 이 무슨 실없는 생각인가!

김상조 제주대 교수·한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