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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노트] 3·1 운동 때 ‘폭력 시위’도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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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2월 27일 경기도 안성의 3.1운동기념관에서 열린 학술대회는 그런 경향을 확인해주었다. 한국민족운동사학회(회장 박환 수원대 교수)와 수원대 동고학연구소(소장 이종건)가 주최했다. 주제는 '안성지역 3.1운동의 특성과 역사적 의의'.

박 회장은 3.1 운동 당시 안성 지역에 대한 경찰의 현장검증 도면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양성면 경찰관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 등이 시위대에 의해 불탄 모습이 그려져 있다.

김호일 중앙대 명예교수는 "1919년 4월 1일 안성 지역의 원곡.양성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농민 2000여명이 참여한 공세적 운동의 대표적인 예다. 경부선 철도의 차단까지 시도했다"고 밝혔다.

안성지역의 독립운동이 상대적으로 과격한 양상을 띈 이유는 무엇일까. 성주현 한양대 교수는 '생존권 투쟁'에 주목했다. 안성지역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로 상업의 중심지였다.

전국 3대 시장으로 꼽혔던 안성장은 1905년 경부선의 개통과 평택역의 설치로 명성을 잃게 된다. 이는 지역경제의 쇠락을 가져와 결국 생존권을 위협받게된 민중들이 만세운동에 공세적으로 참여하게 됐다는 논리다.

지방에서의 폭력 시위와 생존권 투쟁이란 관점을 적용하면서 3.1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깊어지고 있다. '폭력 시위'란 용어를 3.1운동에 연결시키는 일이 부자연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큰 변화다. 민중의 생활을 중심으로 미시적으로 연구한 결과다. 3.1 운동 연구가 지방으로 확산된 계기는 지방자치단제의 후원이다. 지역 정체성 찾기다.

중앙에서 지역으로 연구의 중심이 이동하며 나타난 역사 인식의 변화를 좀 더 확대적용할 순 없을까. 지자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차원을 넘어 일제 식민지 시절에 대한 보다 다양한 연구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본다. 진정한 의미의 '과거사 정리'는 다양한 시각의 연구와 토론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지난한 작업이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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