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유목민·피난민 … 렌즈 속에서 들꽃처럼 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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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집시, 몽골 유목민, 스페인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달동네 빈민, 코소보와 르완다 난민, 이라크 피란민…. 그들에게는 집이 없다. 유랑, 분쟁, 도시개발, 자연재해, 전쟁으로 제 땅에서 내몰린 방랑자에게는 하늘이 지붕이다. 떠도는 이의 얼굴은 거칠고 파리하나 사람 냄새는 오히려 물씬하다.

사진가 성남훈(43.전주대 사진학과 객원교수)씨가 마음을 뺏긴 것은 다 버리고 다 놓아버린 그 눈동자였다. 받은 목숨을 따라 굽이굽이 길에서 길로 이어지는 삶은 고달프겠지만 비운 몸은 들꽃처럼 피어난다. 성씨가 카메라로 이들을 좇아온 지 15년. 다큐멘터리 사진의 정신과 순수 사진의 정감 그 어느 쪽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작가는 자신의 사진을 '중성적 형태'라고 부른다.

성남훈 사진집 '유민의 땅'(눈빛 펴냄)은 버려지고 내쫓긴 인간을 이 '중성의 눈'으로 지켜본 기록이다. 200여 점 흑백 사진은 다소곳하면서도 뜨겁게 인간의 땀과 눈물을 보여준다. 한때 연극판에서 놀았던 작가는 사진 한 점 한 점을 무대로 만들었다. 비어 있는 공간 사이사이에 인간을 인간으로 견디게 하는 긴장과 힘이 뼈대처럼 서있다. 그늘진 삶의 변두리일지라도 인간은 스스로 힘있는 풍경이 된다.

보스니아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 20여 개 나라의 국경을 넘으며 그가 찾은 것은 소외와 비주류의 삶이었다. 삶과 죽음이 함께 고여있는 그곳에서 작가는 "처음이 아니라 끝, 결과가 아니라 원인, 어제가 아닌 오늘과 내일을 위한 내밀한 삶의 이야기"를 찾았다.

"'유민의 땅'은 제 15년 세월의 결산이면서 세상에 내미는 손입니다. 굶주린 아이들에게 음식을, 다친 이에게 의료진을, 지진으로 무너진 땅에 칠판을 보내기 위한 호소입니다. 사진으로 뜻이 통하고 싶은 소통 수단인 셈이죠. 이 책으로 사람을 만나고, 이 사진으로 사람 마음을 움직이고 싶습니다."

그의 사진은 이미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 박노해 시인은 "성남훈의 사진 속 눈동자에서 나는 지난 6년 동안 눈물 흐르는 지구마을의 골목길에서 마주친 눈동자를 다시 만난다"고 썼다. 사진평론가 진동선씨는'유민의 땅'을 "시간 저쪽으로 밀려난 존재들의 사라짐을 막는 아름다운 인간정신의 사진집"이라고 불렀다.

사진집에 실린 작품은 4일부터 29일까지 경기도 양평 사진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사진가와의 대화 시간이 이어진다. 031-771-5454.

정재숙 기자

*** 바로잡습니다

3월 1일자 20면 '사진가 성남훈 15년의 기록' 기사에서 화랑 이름이 빠졌습니다. 전시회는 경기도 양평 사진갤러리 와(瓦)에서 4일부터 29일까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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