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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이기가 사라지니 가족이 보이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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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호 30면

ⓒ도쿄예술극장 photo by Kishin Shinoyama

ⓒ도쿄예술극장 photo by Kishin Shinoyama

“물 한 잔만 주지 않겠나.”

연극 ‘밖으로 나왓!’ #기간: 11월 23~26일 #장소: 명동예술극장 #문의: 1644-2003

연극 ‘밖으로 나왓!’의 처음과 끝 대사다. ‘고전극의 거장’은 러닝타임 90분 내내 목이 타 쩔쩔 매지만 끝내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한다. 왜일까.

‘밖으로 나왓!’은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차례로 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한국·일본·중국 3국이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며 시작한 ‘문화올림픽’의 일환으로, 국립극단이 초청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일본의 연극 거장 노다 히데키의 3년만의 내한 작품으로, 이번엔 작·연출·주연까지 1인 3역을 소화했다. 올리비에상 수상 배우 캐서린 헌터와 글린 프릿차드 등 9‧11 테러를 다룬 전작 ‘더 비(The Bee)’로 10개국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팀이 다시 뭉쳐 국적을 초월한 끈끈한 호흡을 과시했다.

출연자라곤 배우 3명과 악사 한 명 뿐이지만, 이 작고 소박한 무대에 전통과 현대를 모두 담아냈다. 2010년 일본어로 초연된 작품을 7년 만에 영어 버전으로 개작한 무대인지라, 글로벌 세상에 고유의 문화적 색깔을 드러내는 방법론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배우의 3분의 2가 서양인에 거의 모든 대사가 영어지만, 누가 봐도 일본 연극이다. 전통에 대한 오마쥬가 분명한 스타일이지만 옛날 이야기를 하거나 애써 서양 텍스트를 접목시킨 것도 아니고, 요즘 사람들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풀어냈다.

어느날 저녁 고전극협회 623주년 기념식에 가야 하는 ‘고전극의 거장’ 아빠와 아이돌그룹 콘서트에 가야 하는 엄마, 내일 아침 브런치를 먹기 위해 오늘밤부터 줄을 서야 하는 딸 중 누구 하나는 집에 남아야 한다. 출산 직전인 강아지 ‘프린세스’ 때문이다. 오직 서로를 못 나가게 하기 위한 한바탕 해프닝 끝에 결국 모두가 사슬에 묶이고 모든 통신수단도 박살난 채 집안에서 꼼짝 못하는 재난 상황에 처한다.

무대는 노(能) 무대를 변형시킨 형태다. 노에서 등퇴장 통로이자 저승과 이승을 이어주는 다리인 좌측 뒤편의 하시가카리(橋掛り)가 단절된 집안과 외부를 잇는 통로로 사용되고, 우측 악사석에선 인간문화재 다나카 덴자에몬 제13호가 홀로 다양한 타악기를 사용해 가부키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한다. 성별 교차의 미학이 발달한 일본 극예술 전통을 패러디해 모든 배우가 성역할을 바꿨지만 굳이 고유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숨기지 않아 폭소를 유발한다.

ⓒ도쿄예술극장 photo by Kishin Shinoyama

ⓒ도쿄예술극장 photo by Kishin Shinoyama

내용은 노의 막간극으로 발달한 희극이자 일본 4대 예능의 하나인 교겐(狂言)의 풍자정신을 잇고 있다. 교겐이 늘 “이 부근에 사는 사람입니다”라는 소개로 시작해 어디에나 있을 법한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모노를 입고 과장된 슬랩스틱 연기를 펼치지만 그들의 대화는 결코 낯설지 않다.

수 백명이 참가하는 기념식에 간다던 아빠는 알고 보니 친구 두 셋과 원더랜드에 가려 했고, 엄마는 기술문명을 배척하는 아빠 몰래 스마트폰을 애용하고 있다. 게임 캐릭터 코스프레 복장을 하고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딸은 사이비종교의 세계관에 빠져 “우리 모두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일부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통신 수단이 모두 파괴된 상황에 소리 질러 이웃에게 호소하려 해도 고전극 발성을 위해 온 집안을 방음처리해 놓은 탓에 아무 소용없다. 각자의 세계에 갇혀 서로를 돌아보지 않던 가족은 기술문명의 도구들이 모두 사라지자 비로소 서로를 마주보게 되고 서로를 즐겁게 해주려 노력한다. 한바탕 난리법석 끝에 싹트는 일본 특유의 동화적 휴머니즘이다.

‘고전극의 거장’이 끝내 물 한 잔을 얻어먹지 못한 것은 이웃과 한 마디도 나눈 적 없고 가족끼리도 진정한 관심을 갖지 않는 현대인들의 소통 부재 탓이다. 온갖 디지털 소통수단이 난무하는 지금도 여전히 물 한 잔을 얻어먹기 위해서는 가족의 사랑과 이웃의 관심이 필요하다. 작은 방 한 칸에서 세 식구가 잠시 벌인 해프닝에 그야말로 ‘우주의 원리’가 담겼다. 이런 게 바로 연극의 맛 아닐까.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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