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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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7호 04면

해마다 이맘때면 집에서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이 즐겁습니다. 자작나무의 하얀 몸통들과 무수히 많은 노란 은행잎이 밝고 환한 터널을 만들기 때문이지요. 바람이라도 한 줄기 불어주면 또 그런 환영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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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가 떠오릅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로 시작하는 ‘가을날’ 말입니다.

릴케는 톨스토이를 흠모했고, 로댕의 비서를 지냈으며, 세잔의 그림에서 깨달음을 얻었죠. 릴케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로댕을 비롯한 유럽의 수많은 문화계 인사들과 교유한 이야기를 최근 출간된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에서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특히 비상한 분석력으로 릴케의 지적 치료사 역할을 한 열네 살 연상의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이야기도.

다시 ‘가을날’을 찾아 읽다가 학창시절 궁금했던 구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라는 대목입니다. 당시엔 ‘집이 없다면 당장에라도 어떻게 해서라도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추운 겨울이 곧 닥쳐올 텐데’라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이젠 릴케의 생각이 어렴풋이 짐작됩니다. 인간의 게으름과 나태에 대한 통렬한 비판입니다. 가을이 될 때까지 좋은 세월 동안 도대체 뭘 했느냐는 힐난이랄까. 하여 지금까지 집이 없는 사람은 “불안스레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가을에 씨를 뿌리는 사람은 농부가 아니겠지요.

정형모 문화에디터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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