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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식체 따라 써 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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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지영 문화부 차장

이지영 문화부 차장

육아 책에서 자주 인용하는 시 중에 미국 작가 다이애나 루먼스의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이 있다.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로 시작되는 시엔 부모들이 새겨둘 만한 대목이 꽤 많다. 특히 ‘아이를 바로잡으려고 덜 노력하고/ 아이와 하나가 되려고 더 많이 노력하리라’와 ‘덜 단호하고/ 더 많이 긍정하리라’는 아이들이 커 가면서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구절이다. 일기장의 비뚤어진 글자를 지우개로 지워주며 다시 쓰라고 강요했던 초등생 학부모 시절이 후회스러우면서다.

부질없는 잔소리를 참 많이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바른 가치관과 생활 습관을 길러주겠다는 사명감에서였는데 돌아보니 쓸데없는 실랑이로 행복을 누릴 시간을 소모했다는 아쉬움이 크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잔소리의 한계는 뚜렷해졌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아이가 스마트폰에 빠져들고, 교복을 줄여 입고, PC방에 들락거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바로잡겠다며 단호해질수록 아이와의 관계만 어긋났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최근 화제를 일으킨 ‘급식체’도 종종 분란의 씨앗이 됐다. 학교 급식을 먹을 나이인 10대들 은어를 일컫는다. 지난달 tvN ‘SNL 코리아 9’에 ‘급식체 특강’ 코너가 생긴 뒤로 대중의 관심까지 받게 됐다. 급식체라는 게 어른 귀엔 못마땅한 표현 일색이다. 감탄할 만한 상황에서 쓰는 ‘오지다’ ‘지리다’만 해도 그렇다. 여기에 ‘핵’ ‘개’ 등을 접두사로 붙여 강조까지 하면 어감은 더욱 나빠진다. 집에서 아이들이 급식체를 쓰면 “언어가 그 사람의 품격을 드러낸다”며 훈계를 늘어놓곤 했다. 대화 도중 급식체가 튀어나오면 이야기는 끊기고 분위기가 냉랭해지기 일쑤였다.

올 초 두 아이의 고교·대학 입학을 앞두고 오랜만에 가족 여행을 갔다. 여행지에서의 자유로운 기분 덕분이었을까, 아이들의 급식체 말투가 덜 거슬렸다. 사흘 내내 24시간 함께 지내다 보니 몇몇 말을 따라 하게 됐다. 동의할 땐 ‘인정’, 재미없으면 ‘핵노잼’, 잘됐다는 뜻의 ‘개꿀’ ‘개이득’ 등 구사 가능한 급식체는 점점 늘었다.

급식체가 화제가 되면서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말장난 남발로 언어 파괴를 조장한다”는 우려다. 하지만 급식체를 따라 써 보니 얻는 점도 여럿이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은근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대화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또 아이들이 내 걱정을 하는, 기분 좋은 반전의 순간도 있다. 며칠 전 내가 다이어트 이야기를 하며 “‘처묵처묵’하는 게 문제”라고 했더니 딸이 진지한 표정으로 한마디한다.

“엄마, 자꾸 그런 말 쓰면 이젠 ‘많이 먹는다’란 표현으로 만족 못할 텐데요.”

이지영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