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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가난한 예술가의 초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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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이 땅에서 재즈만 연주해서는 먹고사는 게 어려울 거라 예상은 했지만 직접 뮤지션의 속사정을 듣고 나니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이제 막 멋진 연주를 들려주고 나서 털어놓는 얘기라 안타까움이 더했다. 입시 과외라도 할 수 있으면 생계는 유지할 수 있지만 그마저도 전문 학원이 많아 부업 연주자들에게는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리운전도 하고 공사현장에서 잡일도 하며 살고 있다고. 고단한 삶이 힘들지만 더 괴로운 것은 연습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없는 것이란다. 영화 ‘라라랜드’를 보면 처음엔 고생을 해도 나중에는 멋진 재즈 바도 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도 하던데. 역시 영화는 영화일 뿐인가 보다. 현실에서 해피엔딩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인간은 일하는 존재지만 또 놀이하는 호모루덴스 #예술가들이 일한 대가만큼은 정당하게 지급해야

주변에서 보는 예술가의 초상은 언제나 가난하다. 음악의 아버지라 추앙받는 바흐도 가족의 생계를 걱정했고, 세기의 천재 모차르트도 빚에 쪼들렸다. 가곡의 왕으로 불리는 슈베르트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까. 그래도 반 고흐에 비할까.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채 고독하고 비참하게 살다 권총 자살로 37세의 삶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반 고흐의 작품들이 모두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고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생전에 단 하나의 작품밖에 팔지 못했다. 다른 나라 예술가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비운의 천재 화가 이중섭의 인생도 극심한 빈궁과 처자식을 일본으로 보낸 후의 애절한 고독으로 가득하다.

예술가의 숙명이라고 해야 하나. 예술가의 가난은 시대가 변해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예술로 돈을 번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 실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예술 활동으로 연간 300만원도 못 버는 예술가가 절반 이상이며, 응답자의 36.1%는 아예 예술 활동 수입이 전무하단다. 사정이 이러하니 생활고에 시달리다 일찍 세상을 등지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반지하 자취방에서 쓰러진 인디 가수 이진원이 그렇고, 제대로 먹지 못해 죽은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이 그렇다. 이들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예술인복지법이 만들어지고 복지재단도 설립됐다지만 예술가들의 빈궁한 처지가 개선됐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예술가를 돕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도 적지 않다. 자기가 좋아 선택한 예술인데 왜 국가가 나서서 이들을 도와야 하느냐는 것이다. 자영업자가 망하면 국가가 도와주는 것 보았느냐는 말이 덧붙는다. 어떤 이들은 예술가는 가난해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믿기도 한다. 최근 구설에 오른 모 대학 총장의 발언이 그렇다. 이들의 반감은 프랑스가 예술정책으로 국격을 높였고 예술 작품 경매와 관광을 통해 엄청난 국익을 창출했다는 정도로는 누그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예술가들이 일한 대가만큼은 정당하게 지급해야 하지 않을까. 수천 건이 넘는 다운로드와 스트리밍에도 정작 연주자가 받는 수입은 한 끼 식사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예술가는 가난하기 마련이라고 외면해야 할까. 열심히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상황이 정상은 아니다.

날씨가 부쩍 쌀쌀해졌다. 여름 내내 땀 흘리며 먹을 것을 준비한 개미는 걱정이 없겠지만 노래만 부른 베짱이들은 두렵다. 긴 겨울 동안 굶어 죽을 수 있으니까. 우화가 주는 교훈은 설명이 필요 없다. 추위에 떨며 음식을 구걸하는 그림책 속 베짱이의 모습으로 충분하니까. 그러나 베짱이가 없는 사회는 정말 행복할까. 인간은 일하는 존재지만 놀이하는 호모 루덴스이기도 하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는 영어 속담도 있지 않은가. 지금부터라도 예술가들이 추위 걱정 없이 맘껏 끼를 발휘할 수 있는 무대와 공정한 보상 규칙을 만들어 줘야 한다.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는 놀라운 기술의 시대에도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바로 놀 줄 아는 힘이니까.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