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이란 '앙숙의 저주'…레바논 총리가 사라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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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레바논인가.
사우디아라비아가 9일(현지시간) 레바논에 머무는 자국민들에게 서둘러 출국할 것을 권고했다고 AFP통신 등이 보도했다. 사우디의 실권을 쥔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가 ‘피의 숙청’을 단행하고, 수니파 종주 사우디와 시아파 이란이 중동에서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나온 발표다.

사우디아라비아 북쪽에 위치한 중동 국가 레바논. [사진=구글 지도 캡처]

사우디아라비아 북쪽에 위치한 중동 국가 레바논. [사진=구글 지도 캡처]

 아델 알주바이르 사우디 외무장관은 이날 CNBC와 인터뷰를 갖고 “이란이 테러를 지원하고 있으며 국제사회에서 강력한 신규 제재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버락 오바마 시절 맺은) 핵협정을 개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레바논이 사우디에 해를 끼치게 둘 수 없다”고 말했다. 이슬람교의 수니파와 시아파뿐 아니라 기독교 종파도 함께 적정한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던 레바논에서 최근, 친이란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급격히 세를 불리고 있음을 겨냥한 것이다.

사우디 방문 레바논 총리, 느닷없는 사임 발표 #사우디, 쿠웨이트 등에선 '레바논 자국민 철수령' #레바논 내에서 '사우디-이란' 대리전 벌어질까 불안

사우디가 이런 결정을 내리자,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리트 또한 레바논의 자국민들에게 철수령을 내렸다. 이미 바레인은 지난 5일 자국민에게 레바논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권고했다. 이들 국가 모두 사우디와 가깝다.
이 때문에 레바논에서 무슨 일이 터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안팎에서 쏟아지고 있다.

사우디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 레바논 총리

지난 3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방문 중에 전격 사임을 발표한 사드 하리리 레바논 총리. 그의 아버지 라피크 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는 2005년 헤즈볼라가 배후로 의심되는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지난 3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방문 중에 전격 사임을 발표한 사드 하리리 레바논 총리. 그의 아버지 라피크 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는 2005년 헤즈볼라가 배후로 의심되는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레바논의 불안감이 증폭된 것은 지난 3일이다.
사우디를 방문한 사드 하리리 레바논 총리가 TV 연설을 통해 돌연 사임을 발표한 것이다. 이란이 레바논에 내정 간섭을 하고 있으며, 자신이 헤즈볼라 등에게 암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후 지금까지 하리리 총리는 레바논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사라진 총리’에 레바논은 들끓고 있다. 사우디가 명백히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분노다.

로이터통신은 9일 레바논 고위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사우디와 이란의 충돌이 레바논을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고 있으며, 레바논 사람들은 현재 하리리 총리가 사우디에 붙잡혀 있다고 믿고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사우디에서 하리리는 사임하라는 압박을 받았고, 사직서를 읽도록 강요당했다"며 "이후 가택연금 상태에 처했다”고 밝혔다.

사우디는 관련 보도를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하리리 총리가 레바논과 사우디 이중 국적자이기도 해, 그의 ‘사우디 감금설’은 힘을 더해가고 있다.

무함마드 빈살만 알사우드 사우디 왕세자.

무함마드 빈살만 알사우드 사우디 왕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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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NYT)는 “하리리 총리가 지난 7일 사우디의 동맹국 아랍에미리트를 방문한 후, 곧 레바논으로 돌아갈 것이란 예상을 깨고 다시 사우디 수도 리야드로 향했다”며 “그가 사우디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의문이 나오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이후 하리리 총리는 리야드에서 프랑스 대사, 영국 대사 등을 만난 것으로 전해지지만 그가 정확히 어디에서, 어떤 상태로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NYT는 또 “최근 레바논 신문 알아크바르 1면에 ‘하리리가 인질로 잡혔다’는 기사가 실린 것만 봐도 레바논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고 보도했다. 현재 레바논 정부는 하리리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있다. 그가 레바논으로 돌아와야 상황 파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레바논, 사우디-이란 대리전 벌어질까 불안

총리가 돌아오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사우디가 자국민 철수령까지 내리자, 레바논 사람들은 사우디와 이란의 갈등이 예멘에 이어 레바논으로 번지는 것 아니냐는 불안에 휩싸였다.

내전으로 주요 건물과 도로, 유적 등이 파괴된 예멘. [AP=연합뉴스]

내전으로 주요 건물과 도로, 유적 등이 파괴된 예멘.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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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파의 지원을 받는 하리리 총리의 정당 ‘미래운동’ 세력과 헤즈볼라 등 시아파가 부딪치면, 이는 곧 사우디와 이란의 대리전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현재 예멘이 그런 상황으로, 국내 수니파와 시아파 간 갈등이 사우디와 이란의 대결로 번져 3년째 혹독한 내전을 치르고 있다.

알주바이르 사우디 외무장관의 발언은 레바논의 이런 불안감에 불을 붙였다. 그는 전면전 가능성에 대해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레바논의 현재 상황이 '불행'하다며 "헤즈볼라가 레바논 정부를 방해하고 있으며, 레바논 국민이 헤즈볼라의 발밑에서 벗어나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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