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님께 지역 역사 배우는 시골학교의 ‘마을 선생님’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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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지난달 17일 충북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에서 마을 탐방에 나선 동이초 학생들이 교육을 마친 뒤 마을 선생님과 함께 들판을 뛰어가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지난달 17일 충북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에서 마을 탐방에 나선 동이초 학생들이 교육을 마친 뒤 마을 선생님과 함께 들판을 뛰어가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지난달 17일 충북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 마을에서 약 3㎞ 떨어진 충혼탑에서 이 마을 이장 김태형(53)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동이초등학교 1~6학년 학생 12명이 귀를 쫑긋 세우며 그를 바라봤다.

전교생 39명인 옥천 동이초등학교 #은퇴교사·주민 등 6명 교문 밖 수업 #생태 탐구, 열매 수확 체험 등 진행 #충북 7개 시·군 행복교육지구사업 #지역 특색 살려 교육 프로그램 설계

“이 충혼탑은 동이면 출신 전몰군경과 호국용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98년 건립했어요. 비석 뒤에 81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요.” 적하리 한쪽에는 1937년 동이면 사람들이 건립한 구휼비(救恤碑)도 있다. 김씨는 “이 구휼비는 1800년대 후반 배고픔에 시달리던 이웃을 도운 김동시 어르신을 위한 비석”이라고 설명했다.

백발이 성성한 김인호(78)씨는 마을 유래를 얘기했다. 그는 “원래 마을 이름은 적령(赤嶺), 저기 보이는 언덕에 나무 한 그루도 없이 빨간 흙이 잔뜩 있어서 그리 불렀다”며 “나중에 아랫마을까지 행정구역에 포함되면서 적하리(赤下里)란 이름으로 바뀌었지”라고 했다.

적하리 주민 김인호씨는 마을 입구에서 구휼비를 소개하고 마을의 유래를 설명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적하리 주민 김인호씨는 마을 입구에서 구휼비를 소개하고 마을의 유래를 설명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마을 이장과 귀농인이 교사로 나서 교문 밖 수업을 하는 학교가 있다. 전교생이 39명인 옥천 동이초 얘기다. 이 학교는 올해 6명의 ‘마을 선생님’이 참여하는 마을교육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누구보다 마을 사정을 잘 아는 주민들과 함께 동네를 둘러보며 역사와 설화·미담 등을 공부한다. 학생들은 딱딱한 교실을 벗어나 마을 곳곳에 있는 유적을 살펴보고 관공서와 기업체 탐방도 했다. 충북은 동이초가 있는 옥천군을 포함해 7개 시·군에서 이 같은 행복교육지구 사업을 하고 있다. 마을교사 양성 등을 지역 특색에 맞게 학교측과 교육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만들고 있다.

동이초 학생들은 1학기에 안터마을에 들러 반딧불이 생태를 탐구하고 블루베리 농장에서 열매 수확 체험을 했다. 2학기에는 적하·평산·금암·청마리에 사는 마을 선생님들과 함께 역사·문화를 탐방했다. 모두 22시간 교육으로 마을의 인적·물적 자원을 직접 확인하고 이를 친구들에게 발표하는 일정으로 짜였다.

김태형 이장은 아이들과 벼 말리기 체험을 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김태형 이장은 아이들과 벼 말리기 체험을 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동이면 솟대·장승 문화 유적지 방문뿐만 아니라 면사무소·파출소·보건소 등 관공서와 향토기업, 옛 학교 터 방문까지 교육장소는 다양하다. 마을 선생님으로 활약하고 있는 전직 교사 이낙순(67)씨는 비석 하나로 아이들에게 조선말 역사를 쉽게 설명했다. 그는 “동이면 평산리에 있는 이기윤 망북비(望北碑·국상을 당할 때 지방 유림이 북쪽을 보며 절을 하던 곳)를 통해 조선이 망하게 된 배경과 당시 상황을 알려줬다”고 말했다.

다리가 불편한 주민 김명순(64·여)씨가 하천에서 주운 조약돌과 집에서 정성스럽게 기른 꽃으로 조성한 마을 정원을 아이들에게 설명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동이초 임정연(8)양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마을을 아름답게 꾸미려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봉사하는 마음을 배웠다”고 말했다.

권혜숙 동이초 교사는 “서울 경복궁 같은 유명 유적지에 가지 않더라도 지역의 역사 유적·유물을 탐방하며 아이들 스스로 학습하는 방법을 알아가게 됐다”고 말했다.

최종권 기자 choig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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