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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수요일은 아내와 데이트...경찰 '워라밸'실험 전면 돌입

중앙일보

입력

한 경찰관서 달력. 달력에 빨간줄, 파란줄, 삼각형 등으로 근무일을 표기해놨다. [사진 경찰청 블로그 캡처]

한 경찰관서 달력. 달력에 빨간줄, 파란줄, 삼각형 등으로 근무일을 표기해놨다. [사진 경찰청 블로그 캡처]

경기경찰청 산하 경찰서 A수사과장(경정)은 이번 주 수요일(8일) 아내와 모처럼 둘만의 데이트를 즐길 계획이다. 수원 광교 아브뉴프랑의 뉴욕 맨해튼 스타일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한 뒤 가까운 영화관에서 최근 개봉작을 관람할 예정이다.

6일부터 경찰청 '업무혁신 추진계획' 전면 시행 #본지 구체적 내용 단독 입수, 현장 반응 추가 취재 #오전 회의 30분 늦추고, 수요일은 정시 출퇴근 #주말 관서장 주재 회의 지양, 산상 워크숍 금지 #일과 삶의 균형의미 '워라밸' 기반 마련 기대 커 #24시간 365일 근무 경찰 특성상 흐지부지 우려도

수요일 오후 6시 칼퇴근을 보장하는 내용이 담긴 ‘경찰청 업무혁신 추진계획’이 6일부터 전면 시행하면서 생긴 변화다. A과장은 “주말에 경찰서장이 주재하던 티타임(tea-time)도 사라진다. 이제는 아이들과 가까운 곳으로 1박 2일 캠핑도 무리 없이 갈 수 있게 됐다”며 반가워했다.

심야시간에 음주단속 중인 경찰관. *본 기사와 직접적 연관 없습니다. [중앙포토]

심야시간에 음주단속 중인 경찰관. *본 기사와 직접적 연관 없습니다. [중앙포토]

반면, 또 다른 경찰서 정보계에 근무하는 B경사는 이번 업무혁신 계획 시행에 따른 걱정이 벌써 태산같다. 월평균 60여 시간의 초과근무 수당으로 부족한 가계 생활비를 보탰는데, “일을 더 하지 말라”는 방침에 따라 초과근무가 20시간대로 제한됐기 때문이다. 시간당 초과근무 수당은 계급별로 다른데 지난해 기준으로 순경 8256원~경정 1만3007원이다.

B경사는 “결과적으로 실제 손에 쥘 수 있는 월급이 40만원가량 줄어들게 생겼다. 소득이 줄게 해놓고 여가를 즐기라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당장 한 달에 15만원 하는 딸 아이의 피아노 학원을 그만 다니게 해야 할지 심각히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대표적인 격무 공무원으로 꼽히는 전국 경찰관들의 근무 제도에 6일부터 큰 변화가 시작됐다. 중앙일보가 단독 입수한 경찰청의 ‘경찰청 업무혁신 추진계획’에 따르면 이날부터 오전 회의시간을 오전 8시 30분에서 9시로 30분 늦췄다. 수요일은 정시 출·퇴근의 날(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을 도입하는 내용 등도 담았다.

이날부터 전면 시행에 들어간 업무혁신 추진계획에 따르면 주말·휴일과 일과 외 시간을 적극적으로 보장한다. 유연 근무 활성화, 집중근무시간 운영(오전 10시~낮 12시, 오후 2시~4시), 연가 사용 활성화를 장려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경찰은 돌발적인 사건사고에 대응하는 업무 외에도 범죄예방에도 힘쓰고 있다. *본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 없습니다. [중앙포토]

경찰은 돌발적인 사건사고에 대응하는 업무 외에도 범죄예방에도 힘쓰고 있다. *본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 없습니다. [중앙포토]

이를 놓고 경찰 조직 내부에서는 일단 민간 기업에서 확산 중인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뜻)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경찰관의 주당 평균 근로시간은 51.23시간(경찰공무원의 근로시간 실태 및 인식에 대한 설문조사·2012년)이다.

업무혁신 추진계획 세부사항에 주말 관서장 회의주재 지양을 비롯해 산상(山上) 워크숍 개최 금지, 휴일 및 일과 외 시간 메신저·전화를 통한 업무지시 금지 등이 포함됐다. 이에 그동안 관행적으로 이뤄지던 불필요한 업무와의 결별을 기대하는 분위기다. ‘메신저 감옥’이 사라졌다는 말도 나온다.

일선 경찰서 과장급 간부는 “비상·돌발상황이 없는 평상시에 정시 퇴근하면 위에서는 ‘일 안 하는 직원’으로 좋지 않게 보는 시각이 분명 있었다. 자신의 상황에 맞게 출퇴근을 조정할 수 있는 유연 근무제 등이 뿌리 내린다면 가정이나 자기 계발에 더 신경 쓸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전체 경찰조직을 지탱하는 ‘개인’들에 대한 존중이 정착되면 결국 ‘조직’에 더 잘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밖에 초과근무 수당에 필요한 예산도 줄일 수 있다. 경찰의 초과근무 수당 규모는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를 통해 단 한 번 일부 공개됐는데, 2008년 기준 954억6168만여원이었다.

사건 현장 폴리스라인. * 본 기사내용과 직접적 연관 없습니다. [뉴스1]

사건 현장 폴리스라인. * 본 기사내용과 직접적 연관 없습니다. [뉴스1]

하지만 24시간 365일 쉼 없이 돌아가는 경찰 근무환경 특성상 이번에 도입된 혁신 방안이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평일·주말이나 주·야간 구분 없이 돌발 상황이 터지는 경찰업무 특성상 쉬면 그만큼 동료의 일은 늘어난다는 주장이다. 경찰청 통계연보(2015)에 따르면 경찰관 1인당 담당 인구는 456명이나 된다.

익명을 요청한 팀장급 경찰관은 “인원은 부족하고 일은 바쁘게 돌아가는데 위에서는 연차를 쓰라고 하니 참 답답하다. 경무·생활안전 등 내근을 선호해 형사·수사 등 민생부서 기피 현상이 더 심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 7월 국민안전처에서 해양수산부 산하 독립 외청으로 분리된 해양경찰청도 현재 경찰청의 업무혁신 추진계획 같은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해경 관계자는 “시행 시기는 미정이지만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수원=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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