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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면 보호받는 사회안전망 마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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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산업 4.0 시대의 고용시장 대비책은

지난해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과학기술 분야가 주요 의제로 채택된 건 포럼 창립 이래 처음이었다. 과학에 기반을 둔 기술 발전이 세계 경제판을 뒤흔들고 있어서다. 파괴 또는 창조라는 단어가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정도다, 기존의 교육시스템이나 사회간접자본, 노동시장으론 대처하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문별로 파괴에 버금가는 갈아엎기가 불가피하다. 세계 각국이 일찍부터 경제체제에 대한 객토 작업에 나선 이유다.

리셋코리아 고용노동분과 제안 #일터(직장) 중심의 고용정책을 #장터(시장) 중심으로 확 바꿔야 #획일적 강제 대신 개인의 가치 존중 #근로자의 선택권·자율성 보장해야 #정부주도에서 민간주도로 분권화 #정신적 안전 중시하는 대책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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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어떤가.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선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그러나 실행을 위한 각론은 보이지 않는다. 말만 무성할 뿐이다. 사회 시스템의 창조적 파괴 대신 돈만 쏟아붓는 형국이다. 그것도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해서다. 노동시장에 대한 접근은 오히려 1970~80년대로 회귀하는 듯한 움직임마저 보인다.

리셋코리아 고용노동분과위원들은 “고용시장이 크게 변한다는 데 대해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회구성원 누구나 이미 알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예측된 고용시장의 변화에 걸맞은 개혁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과 시장 요구 사이에 상당한 갈등과 혼란이 일어나고, 결국 대한민국호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봤다.

고용노동분과위원들은 ▶고용시장의 유연성 확보 ▶사회안전망 확충 ▶안전보건 혁신 ▶직업능력계발 시스템 개조 ▶분권화를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는 5대 큰 줄기로 제시했다. 이 줄기에 걸맞은 세부 파괴와 창조 과제를 차곡차곡 채워가야 한다는 게 위원들의 충고다.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예전의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에 적용되던 제도가 안 맞아서다. 예컨대 그동안 채택돼 온 인사관리의 큰 축은 회사 주도의 고용이었다. 출퇴근이나 휴가, 휴직, 업무에 대한 통제가 표준화돼 있었다,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약이란 집단적 이해조율에 바탕을 둔 규율로 획일적이고 강제적으로 이행됐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산업혁명은 영 딴판이다. 근면·성실보다 개인적 가치가 중시된다. 집단보다는 개인의 특성에 맞는 맞춤형 고용시장이 열리고 있는 셈이다. 개인의 역량에 따라 임금은 물론 일자리까지 규정된다. 하드웨어 대량생산 시대에서 소프트웨어가 지배하는 사회다. 이걸 잘 다루면 기업 창업은 손쉽게 이뤄진다. 사용자 없는 기업의 탄생이 많아진다. 그래서 근로계약의 개념도 확 바뀌었다. 사용자와 근로자로 규정되던 기존 근로관계에선 근로계약이 일종의 충성계약이었다. 그러나 현재 확산하고 있는 계약형태는 혁신계약이다. 직장 개념의 파괴다.

국가 간 경제 경계는 어떤가. 이미 글로벌화해서 생물학적인 밤과 낮이 없어졌다. 비즈니스 시간이 지배한다. 이러다 보니 경제위기도 완충지대 없이 곧바로 확산한다.

이런 변화에 지금 한국고용시장을 규율하고 있는 노동관계법이 맞을까. 고용노동분과위원의 대답은 같았다. “전혀 먹히지 않는,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입장이다. 주완(변호사) 분과장은 “강행적 기준이 아니라 자율적 계약이란 측면에서 접근이 쉽도록 입법적 대비를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별 4차 산업혁명 준비정도 순위

국가별 4차 산업혁명 준비정도 순위

외국에선 산업 4.0 시대에 대비하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다. 독일의 ‘인더스트리 4.0’과 이에 대응할 ‘노동 4.0’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산업인터넷’이란 이름으로, 중국은 ‘제조 2025’라는 전략을 수립해 진행 중이다.

한국은 걸음마도 못 떼고 있다. 지난해 1월 스위스 최대 은행인 USB가 내놓은 각국의 4차 산업혁명 적응 순위는 현재 한국의 위치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한국은 25위였다. 일본(12위), 대만(16위) 등 다른 아시아 국가보다 낮다. 특히 노동시장에 대한 대처 정도는 139개국 중 83위에 그쳤다. 기술수준(23위), 교육시스템(19위), 사회간접자본(20위) 부문도 낮았지만 고용시장에 대한 대처는 최악인 셈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고용분과위원은 우선 고용시장을 유연하게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무엇보다 유연성을 고용 불안정과 동일시하는 기조부터 바꿔야 한다. 김영기 대한산업안전협회장은 “직장의 개념이 깨져 가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 비정규직이란 이름으로 획일적 고용정책을 쓰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유연성 개념을 기업에 유리한 방향으로만 해석해서도 안 된다. 근로자의 선택권과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휴식보장이나 자기계발 시간 확보와 같은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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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성은 기본적으로 근로자의 역량 계발과 맞물린 과제다. 근로자의 능력이 향상되고 생산성이 오르면 기업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근로자 개인으로선 굳이 한 직장에 얽매일 까닭도 없다. 자신의 능력을 여러 회사에 팔 수 있다. 그게 혁신계약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업능력계발 시스템을 평생교육 시스템으로 개조해야 한다. 나이가 들어도 특정 분야 또는 진로 수정을 통해 평생 먹거리를 근로자 스스로 가질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제도다.

노동4.0시대를 위한 분과위원의 말말말

노동4.0시대를 위한 분과위원의 말말말

사회안전망 확보도 시급하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재 2000만 명인 근로자가 앞으로는 500만 명이 안 될 수 있다”며 “향후 사회안전망은 ‘일하면 보호받는다’는 명제를 갖고 근로자 가치를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리셋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성과체계에서 유발될 수 있는 긴장감과 스트레스라는 새로운 형태의 산업안전에 대한 정책 수립과 같은 ‘안전보건 4.0’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는 것이 박 교수의 지적이다.

이런 개혁은 정부가 주도해서 일굴 수 없다는 게 위원들의 공통된 견해다. 변화에 생물처럼 반응하는 건 행정이 아니라 기업이나 근로자로 구성된 시장이기 때문이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고용안정만 따지는 공공부문 중심의 일자리 정책이 펼쳐지는 한 창조적 파괴 시장이 설 수 없다”며 “자원을 공공부문 중심으로 활용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고 말했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 주도형으로 ‘날 따르라’는 식으로 해서는 4.0 시대에 대비할 수 없다. 생태계를 돕는 방향으로 지원하고, 민간이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분권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정부주도형에서 민간주도형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뜻한다.

리셋코리아 고용노동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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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wolsu@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