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한국당의 박근혜 출당, 보수 혁신 출발점 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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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자유한국당이 어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제명함에 따라 전직 대통령이 소속 정당에서 쫓겨나는 헌정 사상 첫 사례를 남겼다. 노태우 전 대통령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소속 정당에서 자진 탈당하는 길을 걸었지만 징계를 통해 강제 출당된 건 처음이다. 첫 파면 대통령이란 불명예를 안은 데 이어 참담하고 부끄러운 기록이 하나 더 추가됐다.

정치는 책임이 기본, 친박 정리하고 #당 지도부도 기득권 모두 내려 놓길 #인적 쇄신 없이는 재건동력 안 생겨

박 전 대통령은 1997년 한나라당에 입당한 후 20년간 당의 상징이자 보수의 아이콘이었다. 당이 어려울 때마다 보수 진영을 대표해 구원 투수로 나섰다. 물론 그의 유무죄는 법원에서 최종 판가름 날 것이다. 하지만 그간의 공과, 법적 책임과 별개로 정치적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만약 박 전 대통령이 최순실 사태로 민심이 이반했을 때 스스로 당적을 정리하는 ‘질서 있는 퇴진’을 택했다면 보수정치 궤멸 상황은 얼마든지 막거나 피할 수 있었다.

과거의 책임도 그렇지만 한국 정치의 미래를 위해서도 박근혜 흔적은 이제 지울 필요가 있다. 좌우의 균형이 현저하게 깨져 보수 정당 통합의 필요성이 엄연한 상황에서 그의 존재는 통합의 1차적 걸림돌이다. 박 전 대통령은 구속 기간이 연장된 뒤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고 가겠다고 말했지만 당의 ‘탈당 권유’ 결정엔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와 거리가 멀다. 그런 만큼 한국당의 제명 조치는 늦어도 너무 많이 늦은 감이 있는 불가피한 일이다.

문제는 박 전 대통령을 출당시킨다고 한국당이 새로워졌다고 볼 국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당은 박 전 대통령과의 절연을 보수 혁신의 출발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자면 친박 핵심 세력에 대한 정리가 뒤따라야 한다. 정치의 기본은 책임인데 끝내 책임을 지지 않아 민심과의 괴리를 키운 게 오늘의 한국당이다. 친박계 핵심인 서청원·최경환 의원 제명이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많지만 그래선 곤란하다. 보수 유권자들이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박 전 대통령이 남긴 부채를 청산해야 한다.

한국당 지도부의 반성도 요구된다. 한국당은 여러 차례 환골탈태를 다짐했지만 여전히 뼈와 태(胎)는 그대로다. 지도부가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기는커녕 보수의 품격을 잃은 거친 언사로 지지율 하락을 자초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 문제가 정리돼 보수 통합을 위한 발판이 마련됐다. 하지만 설사 통합으로 의원 수가 다소 늘어난다 해도 당의 체질 변화가 없다면 국민의 신뢰 회복은 불가능하다.

한국당이 새 출발하려면 지도부를 포함해 구성원 모두가 기득권을 내려 놓는 게 우선이다. 빈 자리엔 보수 가치를 혁신할 젊은 인재를 수혈하는 자기 헌신의 자세가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보수 세력이 되살아날 수 있다. 너 나 할 것 없이 기득권을 버리고 사람을 바꾸지 않는다면 희망을 주는 세력으로의 환골탈태는 불가능하다. 계파 대결의 이전투구로 빠져든다면 더 이상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