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인공기 꼭 태워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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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혁명가의 피, 인민의 기백, 한 민족 국가. 북한 인공기(人共旗)를 구성하는 삼색(빨강.파랑.하양)에 담겼다는 의미들이다. 가운데 흰 동그라미 속에는 붉은 별이 그려져 있다. '인민의 용감성과 영웅성'을 뜻한다고 한다.

그들이 인공기를 만든 건 딴 살림을 차리려는 채비였다. 막 분단된 한반도 북쪽의 정치적 독자성을 선전할 상징물이 필요했다. 1947년 11월에 시작된 새 국기 만들기 작업은 5개월이 걸렸다. 동그라미 안에 뭘 그려넣느냐가 막판 쟁점이었다.

백두산을 넣자느니, 태양으로 하자느니 하다가 결국 오각별로 낙착됐다. 물론 김일성의 뜻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48년 4월 탄생했고, 그해 9월 9일부터 공식 사용됐다. 9월 9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선포일. 대한제국 이래 우리 민족의 상징이던 태극기가 38선 북쪽에서 사라진 날이기도 하다.

그들이 태극기를 버린 데는 '미국(미 군정청)이 권장하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컸다는 게 정설이다. 소비에트화 과정에 태극기가 장애물이었던 셈이다. 한반도에서 반미(反美)의 역사는 그렇게 북에 의해 시작됐다. 그들이 인공기에서 그토록 강조했던 인민들은 지금 쫄쫄 굶고 있다.

그 인공기가 50년이 훨씬 지나 남한 사회를 시끄럽게 하고 있다. 그들을 추종하는 반미 급진세력의 '성조기 불태우기'에 맞서 보수 쪽의 '인공기 태우기'가 갑자기 나타났다. 말이 없던 보수세력이 집단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원색의 구호가 마구 날아다니는 양 극단의 모양새가 언제든 충돌할 것 같다. 마치 좌-우익이 맞붙던 해방 직후의 모습이다.

보수 쪽이 들고일어선 근본 배경은 두말할 필요없이 북한의 형편없는 태도다. "내내 받아먹고는 그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배신감이 분노가 됐다. 그리고 그런 그들과 노선이 닮은 한총련을 감싸는 듯 말 듯한 정부의 모호한 태도가 거기에 불을 댕겼다.

북한.미국.한총련을 놓고 일관성이 불분명한 정부, 인공기가 불탄 보수단체의 8.15 행사에 동참한 제1야당 대표…. 그래서 혼란은 더욱 심하다.

지금대로라면 2003년은 훗날 '때늦은 남-남(南-南) 이념갈등'이라는 기록을 한 페이지 남길 것 같다. 그러하기에 오늘(29일) 보수단체들이 광화문에서 예정한 인공기 화형행사도 진행이 되든, 봉쇄가 되든 중요한 현장이다.

이쯤해서 생각을 좀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인공기를 태우는 게 잘하는 일인가. 결론은 '그렇지 않다'다. 통일을 지향하고 포용정책을 유지하는 걸 전제로 해서다.

"인내로 만들어낸 화해 무드를 깨는 일" "두 얼굴의 대북 태도에 대한 국제적 신용 하락"등 원론적 얘기 말고도 인공기를 태우지 말아야 할 이유는 더 있다.

그중 중요한 하나가 우리 아이들의 눈초리다. 북한 사람을 괴물의 모습으로 알았던 냉전시대의 왜곡된 시각을 다시 물려주게 될까 걱정이다. 그걸 벗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혹시 지금의 아이들에게 "불태워야 할 만큼 북한은 나쁜 나라"라는 생각이 잠재되지는 않을까. 그건 우리가 그간 희생해온 노력과 세월의 엄청난 후퇴다.

아무래도 인공기 화형식은 55년 전 그들이 태극기를 버리고 인공기를 만들었을 때 했어야 할 일이다. 지금은 성조기를 태우는 일과 비슷한 만큼의 비판을 들을 짓이다. 그래도 꼭 태워야겠다면 하는 수 없다. 태우고 쫓고 쫓기며 어지러울 수밖에.

김석현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