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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평화 위한 노력 소진 뒤 생각할 수 있는 최후의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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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현 한반도포럼 이사장 국제심포지엄 기조연설 전문

홍석현 한반도포럼 이사장은 30일 오전 서울웨스틴조선호텔에서 국가안보전략연구원과 미국의 국제 안보 싱크탱크 아틀란틱카운슬(AC)이 공동주최한 국제심포지엄 ‘평화를 향한 동행’에서 ‘위기의 한반도를 위한 제언’이란 제목의 기조연설을 했다. 이 자리에서 "전쟁은 평화 위한 노력 소진 뒤 생각할 수 있는 최후의 선택"이라고 강조하고 대북정책에서의 국론결집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다음은 연설 전문.

조동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님과 배리 페블(Barry Pavel) 어틀랜릭 카운슬(Atlantic Council) 부사장 겸 브렌트 스코크로프트(Brent Scowcroft) 국제안보센터 소장님. 국제전략 분야에서 한ㆍ미 양국을 대표하는 두 싱크탱크가 공동주최한 뜻깊은 심포지엄에서 연설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신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처음 생각한 오늘 기조연설의 주제는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위한 제언’이었습니다. 평화롭고 번영하며 자유로운 한반도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국제사회의 염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한반도는 평화와 번영, 자유의 고귀한 이상을 논하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엄중합니다. 언제 전쟁의 참화가 밀어닥칠지 모르는 위기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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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롭게 매달린 다모클레스의 칼이 일순간에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지듯이 한반도의 평화가 깨진다면 그 후과는 엄청날 것입니다. 그 피해는 단순히 한반도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4만 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일본도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큽니다. 괌이나 하와이 같은 태평양의 미국 영토는 물론이고, 심지어 미 본토까지 피해를 입게 될지도 모릅니다. 군사적 충돌과 그 여파는 국경을 접한 중국에 미칠 수도 있습니다. 세계 1, 2위의 강대국이 맞붙는 제3차 세계대전이 상상 속의 전쟁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세계 주요 경제대국들이 밀집해 있는 동북아에서의 전쟁이 세계경제에 미칠 파장은 우리의 예측 범위를 벗어납니다.

동방정책으로 독일 통일의 초석을 놓은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는 “평화가 전부는 아니지만 평화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전쟁은 최후의 선택입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전부 소진하고 난 뒤에야 생각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입니다. 제2의 한국전쟁을 막기 위한 위기의 타개책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처음 생각과 달리 오늘 연설의 주제를 ‘위기의 한반도를 위한 제언’으로 바꾼 까닭입니다.

저는 우선 지금 한국인들에게 부여된 지상명령은 평화 속의 비핵화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전쟁은 재앙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한반도에 살고 있던 160만 명의 민간인과 60만 명의 군인이 죽었습니다. 미군 전사자도 3만6000명에 달했습니다. 스콧 세이건(Scott Sagan) 스탠퍼드대 교수는 한국에서 다시 전면전이 일어날 경우 개전 첫 날에만 100만 명이 사망할 수도 있다는 묵시론적 예측을 내놓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선언은 존중되어 마땅합니다.

홍석현 한반도포럼 이사장이 30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국가안보전략연구원-애틀랜틱 카운슬(Atlantic Council) 공동심포지엄’에서 ‘위기의 한반도를 위한 제언’을 주제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조문규 기자

홍석현 한반도포럼 이사장이 30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국가안보전략연구원-애틀랜틱 카운슬(Atlantic Council) 공동심포지엄’에서 ‘위기의 한반도를 위한 제언’을 주제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조문규 기자

지금 미국과 북한 간에는 ‘불벼락’ ‘완전한 파괴’ ‘화염과 분노’ ‘미치광이’ 같은 자극적인 수사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이런 언사들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비겁자가 되지 않기 위해 이미 내뱉은 말에 행동을 맞추다 보면 누구도 원치 않는 파국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무력 시위에 대한 오판이나 오해에서 비롯된 우발적 충돌이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달아 전쟁으로 비화한 수많은 사례를 역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을 막기 위한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가 북한의 군사행동을 유인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수 또는 고의에 의한 북한의 미국 군용기 격추가 전쟁의 도화선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이를 차단할 수 있는 완충장치가 지금은 전무한 실정입니다.

남북대화는 끊긴지 오래고, 이제는 대화 채널조차 없습니다. 북ㆍ미는 물론이고 북ㆍ중 간에도 의미 있는 대화가 실종된지 오래입니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남북 간, 북ㆍ미 간 채널은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한반도 위기의 가장 큰 책임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김정은에게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김정일은 16년의 집권기간 동안 2번의 핵실험과 16번의 미사일 시험발사를 했습니다. 그에 비해 김정은은 집권한지 만 6년이 채 안 됐음에도 4번의 핵실험과 82번의 미사일 시험발사를 했습니다.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핵탄두를 탑재해 실전배치하는 것을 최종목표로 김정은은 핵무장의 완성에 마지막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어떤 압박과 제재를 가해도 핵무장 완성 노력을 중단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완성된 핵무력을 지렛대 삼아 미국과 빅딜을 시도하는 것이 김정은의 숨은 의도일 것입니다.

그 단계에 이르면 한국에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집니다. 미 본토가 북한 ICBM의 직접적 위협에 놓이게 되면 미국이 한국에 제공하는 핵우산 등 확장억지력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를 최대한 활용해 북한은 한국에 대한 온갖 위협을 일상화할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미국이 과거 소련이나 중국에 했던 것처럼 북한을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묵인하고, 핵무기의 사용과 수평적 확산만 저지하는 억지와 봉쇄 전략으로 나아가게 되면 한국은 완전히 알몸으로 허허벌판에 서는 신세가 됩니다.

핵무장 완성을 향한 김정은의 무모하고 위험천만한 질주가 계속되면서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김정은이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 전에 그의 질주를 중단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도 커지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군사적 옵션을 실행에 옮긴다면 그 시점은 북한의 핵무장 완성 이전이 될 걸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모두에게 악몽입니다. 중국과 러시아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동북아 전체가 전화에 휩싸이는 상황은 두 나라로서도 결코 원치 않는 사태일 것입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의 핵과 미사일 시계는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한편으론 우발적 요인에 의한 전쟁 가능성을 최소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해 핵무장 완성 전에 북한이 협상 테이블에 나오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대화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북한에 최대한의 압박을 가하는 것이 그 출발점입니다. 대북 원유 공급 추가 차단, 해외 파견 노동자 추가 감축, 외교 관계 축소 및 단절 등 동원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제재와 압박 강도를 높이고, 외교적 고립을 극대화함으로써 북한이 대화 테이블에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몰아가야 합니다. 북한의 추가 도발을 막기 위한 억지 노력과 더불어 협상을 위한 여건 조성에도 힘써야 합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미 밝힌 ‘4노(No)’ 원칙이 의미있는 대화 여건을 조성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미국은 북한 정권의 교체도, 북한 정권의 붕괴도, 한반도 통일의 가속화도, 38선 이북으로의 미군 이동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책임있는 고위 당국자나 특사가 직접 평양을 방문하거나 제3국에서 북한 측 카운터파트와 만나 미국의 ‘4노’ 원칙을 공식적으로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노력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영어 표현에 ‘Leave no stones unturned’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 돌맹이를 남김 없이 모두 뒤집어 본다는 뜻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전쟁은 최후의 선택입니다. 전쟁을 할 때 하더라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은 다 해봐야 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저는 트럼프 대통령께서 다가오는 아시아 순방 시 위험에 처한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 국민을 안심시켜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북한이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ICBM을 완성해 실전배치하는 날이 오더라도 한국과 일본을 위한 미국의 핵우산은 한 치의 흔들림이나 주저함 없이 정확하고 확실하게 작동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다음달 초 방한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에서 연설하면서 이런 입장을 확실하게 밝힌다면 북한에 대한 강력한 억지 효과와 함께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유인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이런 노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한국과 일본의 자위적 핵무장론이 탄력을 받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사태가 일어날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전쟁을 막고, 협상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국제공조입니다. 견고한 한ㆍ미 동맹과 한ㆍ미ㆍ일 공조는 기본입니다. 하지만 한ㆍ미ㆍ일과 중ㆍ러 간에 간극이 있는 것이 주지의 사실입니다. 지금같이 미ㆍ중, 미ㆍ러 관계가 원활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더 높은 수준의 대북 제재를 끌어내기 힘든 것도 현실입니다. 제재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간극이 커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인 한국의 역할입니다. 북핵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미ㆍ중, 미ㆍ러 관계와 무관하게 중ㆍ러 두 나라가 한ㆍ미ㆍ일과 협조하도록 한국이 나서서 지속적으로 설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ㆍ중 관계가 최악인 것은 맞지만 그래도 북한이 중국에 정면으로 반발하는 행동을 취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19차 당 대회를 마치고 집권 2기에 들어섰습니다. 시 주석이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사태 전반을 재검토하기 시작한 지금이 중국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총력외교를 펼칠 수 있는 적기라고 봅니다. 한국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입니다. 미ㆍ일과 공조해야 합니다. 다음달초 트럼프 대통령의 한ㆍ중ㆍ일 3국 순방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에 대한 공동 대응전략을 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러시아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도 절실합니다. 중국에 비해 비교적 북한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러시아의 역할을 제고할 수 있는 창의적 방안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러시아의 적극적인 역할은 연쇄적인 반향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한반도가 위기 국면에서 벗어난다면 나진ㆍ하산 물류협력사업이나 연해주 경제협력이 활기를 띨 수 있다는 점은 러시아가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인 중 하나입니다.

미국 안보가 직접적으로 위협받는 상황이 되면 자국 안보를 우선시하는 미국은 일방적인 행동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미국제일주의를 강조하는 트럼프 행정부이기 때문에 더 특히 그렇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빈틈없는 공조와 협의가 최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상 간의 친밀도를 높이고, 정부 차원에서도 모든 레벨에서 대미 접촉을 극대화해야 합니다. 의원외교와 공공외교도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미국의 의도를 미리 파악해 한국의 국익과 안전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미국의 정책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북ㆍ미 간 협상은 물론이고 한ㆍ미ㆍ일ㆍ중ㆍ러 5자 공조로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북한을 최대한 압박하면서도 최대한의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포괄적 타협안을 한국과 미국이 함께 마련해야 합니다. 핵 개발에 따른 기회비용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핵 포기에 따른 인센티브도 극대화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라크의 후세인이나 리비아의 카다피와 달리 비핵화를 해도 생존할 수 있다는 확신을 김정은에게 심어줘야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로 가는 길이 열립니다.

북ㆍ미 사이에서 촉매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남북대화가 전제돼야 합니다. 한국이 나서서 북ㆍ미 간 불신의 간극을 메워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북한이 남북대화에 응하지 않는다고 포기하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경제ㆍ문화ㆍ스포츠 분야를 망라한 민간의 모든 막후 채널을 풀가동해 북한과 대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남북, 북ㆍ미 간 투 트랙 대화 채널을 가동해야 합니다. 북한이 핵무장 완성 단계에 이르기 전에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 한반도 평화를 위한 최종 합의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국이 하기를 바랍니다.

정부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대북정책에 대한 국론 결집입니다. 독일이 통일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여야를 초월한 일관된 대동독 정책 추진이었습니다. 지금처럼 각 당이 당리당략 차원에서 안보 문제를 재단한다면 남남갈등의 바람을 타고 한반도 위기의 불길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평화는 상호신뢰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물론 힘도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한ㆍ미 양국은 연합방위 능력을 통한 억지력을 토대로 북한을 견인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북한을 인정하고 체제를 보장하는 것으로 대화의 첫걸음을 떼야 합니다. 한국도 통일을 논하기에 앞서 담론의 초점을 평화 만들기에 맞춰야 합니다. 북ㆍ미 간, 남북 간 대화의 종착역은 한반도 비핵화와 남북의 평화ㆍ공존ㆍ번영입니다. 핵을 포기한 북한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국제경제 체제에 동참함으로써 남북경협이 활성화할 때 한반도는 평화와 번영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지혜·박유미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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