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촛불 1년, 이제 미래를 바라봐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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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해 10월 29일 광화문 광장에서 처음 켜진 촛불은 1년 만에 대한민국을 상전벽해(桑田碧海)로 바꿔 놓았다. 보수·진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일치된 촛불함성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됐다. 대선이 치러졌으며 문재인 정권이 탄생했다. 촛불이 타오르던 6개월 동안 단 한 차례의 폭력 시비, 단 한 명의 구속자도 없었다. 이런 정치적 격변을 시민의 질서 있는 저항 속에 완전히 평화적인 방식으로 이뤄 냈으니 전 세계가 한국의 촛불 집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 상전벽해로 바꾼 촛불 #적폐청산 넘어 미래를 고민해야 #헌법·민주주의 회복 초심 유지를

내일, 촛불 1년을 기리는 대규모 집회와 행진이 광화문·여의도 등 전국 곳곳에서 준비돼 있다. 헌법과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초심을 생각하는 날이 될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행동’이라는 연합세력이 촛불정신을 정의(定義)하고 독점해 정치까지 흔들려 한다. 이들은 집회 뒤에 적폐청산 미흡을 이유로 청와대 앞 경고 행진을 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가 시민들의 비난이 폭주하자 취소한 바 있다. 퇴진비상행동을 이끌었던 민주노총은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노정(勞政)대화에 불응하는가 하면 수감 중인 한상균 위원장의 석방을 요구하는 등 정의를 독점하고, 법치를 무시하는 등 안하무인식으로 설치고 있다. 민주노총을 비롯해 퇴진비상행동에 참여한 많은 단체가 사드 철수, 반미 투쟁, 사실상의 북핵 수용 등 박근혜 전 대통령의 퇴진과 아무 관계 없는 이념선동 투쟁으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오죽하면 퇴진비상행동 측과 다른 방식으로 여의도에서 촛불 1년을 기념하겠다는 순수 시민들의 포스터에 ‘여의도 촛불파티엔 뜬금없는 반미주의, 기-승-전-석방, 대책없는 청와대 행진 세 가지가 없다’는 내용이 들어 있겠는가. 법치와 민주주의, 반듯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들고 일어선 연인원 1700만 명 시민의 촛불이 불법, 반민주, 일그러진 나라를 만드는 건 아닌가 하는 일각의 우려를 직시해야 한다.

문제는 정치권이다. 온 나라가 집권세력이 주도하는 적폐청산이란 칼춤에 몸살을 앓고 있다. 과거를 파고 정적을 치고 정책을 폐기한다. 용서와 화합, 미래를 얘기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런 얘기를 하면 조직된 댓글 부대에 의해 또 다른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몰리기 일쑤니 입을 닫고 침묵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이념과 노선만 달라졌을 뿐 적대의식이나 국가통치 방식은 달라진 게 없다는 한탄도 나온다.

촛불혁명은 정치적 레토릭이다. 이 정부가 촛불로 태어난 것은 맞지만 혁명정권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 나라의 정통성과 안보, 산업의 기틀마저 불태워선 안 된다. 촛불은 시민 일체감과 국민 통합을 만들어 냈다. 촛불은 자기가 타면서 주변을 밝히는 사랑과 희생의 상징이다. ‘나는 정의, 너는 불의’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같은 독선과 오만으로 나라는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촛불은 1주년을 맞아 미래를 바라봐야 한다. 촛불로 단지 정권만 바뀌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집권세력부터 어떻게 나라를 이끌지 깊이 성찰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