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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리플리컨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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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극장에서 나오며 얼굴을 매만져 봤다. 눈과 코, 귀와 입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 어루만졌다. 물건을 보고, 냄새를 맡고, 음식을 먹고 등등,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이쯤 되면 짐작하실지 모르겠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보고 나서다. 내가 혹시 리플리컨트(Replicant·복제인간)인 건 아닌지, 순간 의심이 들었다. 짐짓 장난에 그쳤지만 그만큼 스크린의 잔영(殘影)이 깊었다.

이번 영화는 ‘SF 고전’ 중 하나로 꼽히는 ‘블레이드 러너’를 35년 만에 잇고 있다. 원작의 이름값만큼이나 속편의 만듦새도 튼실했다. 163분이란 만만찮은 상영 시간에도 인간이란 존재의 본성을 파고드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날카롭다. 2049년 황량한 지구에서 서로 물고 물리며 살아가는 리플리컨트의 일상은 오늘날 우리네 장삼이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에서 흥미롭게 본 대목이 있다. 주인공 K의 인공지능(AI) 비서 조이다. 곱고 맑은 여성 캐릭터인 조이는 말 그대로 만능 비서다. K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홀로 지내는 K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듣기 좋은 음악을 틀어주고, 분위기에 맞게 옷도 갈아입는다. 어여쁜 연인 역할도 빠질 수 없다. 복제인간과 AI의 사랑이 어쩐지 짠하긴 하지만….

조이는 인간을 빼닮은 AI다. 10년 안에 암 수술을 하는 AI 외과의사가 등장한다는 뉴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종말론 색채가 가득한 영화와 달리 조이는 AI의 또 다른 미래를 엿보게 한다. 2년 전 알파고 사태에 경악했던 우리들의 허전한 구석을 달래준다. 철학자 김재인의 신간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의 한 대목도 떠오른다. 그에 따르면 밥솥이나 세탁기도 인공지능 분류 측면에서 보면 알파고와 같은 등급이다. 인간 지능의 한 부분을 극단적으로 발전시켰다는 뜻에서다.

지난 주말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을 만났다. 80대 중반의 그는 투병 중에도 AI 화두와 씨름하고 있었다. 교육·의료·오락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AI가 불러올 혁명적 변화를 예견했다. 4차 산업혁명이란 공학적 접근을 넘어 인간 생명의 새로운 확장을 소망했다. 요약하건대 인간이 생략된 AI는 의미가 없었다. 이번 영화의 키워드도 인간다움이다. 리플리컨트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