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右 견제해야 하지만 左 방지가 더 중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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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호 28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50>

천안문 사태 진압 후, 덩샤오핑은 상하이 시위를 진압한 상하이시 서기 장쩌민(왼쪽)을 차세대 지도자로 추천했다. 신임 총서기 장쩌민에게 개혁개방이 중국의 희망이라고 충고하는 덩샤오핑. 1989년 9월 4일, 베이징.

천안문 사태 진압 후, 덩샤오핑은 상하이 시위를 진압한 상하이시 서기 장쩌민(왼쪽)을 차세대 지도자로 추천했다. 신임 총서기 장쩌민에게 개혁개방이 중국의 희망이라고 충고하는 덩샤오핑. 1989년 9월 4일, 베이징.

국가 지도자는 부드럽고 독한 면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 유하고 사람만 좋으면, 말만 번지르르한 측근들에게 휘둘릴 염려가 있다. 마오쩌둥은 이점을 경계했다. 내심은 알 수 없지만, 후계자로 점 찍은 사람들을 가혹하게 단련시켰다. 덩샤오핑도 마음에 둔 후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경제특구 선전 방문해 훈시 #“우, 사회주의 매장시킬 수 있어 #좌 역시 매장시킬 역량 충분 #생산력 증대, 정신문명 건설이 #중국식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것”

1956년, 덩샤오핑을 당 중앙 총서기에 추천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직접 인물평을 했다. ‘비교적’이라는 용어를 반복했다. “덩샤오핑 동지는 비교적 재간도 있고, 일 처리 능력도 있는 편이다. 나와 함께하는 동안 많은 잘못이 있었고, 말 같지 않은 소리도 많이 했다. 그래도 대국(大局)을 살필 줄 알고, 비교적 후한 면이 있다. 일 처리도 비교적 공정한 편이다.” 칭찬도 잊지 않았다. “구하기 힘든 인재인 것은 분명하다. 확고한 정치사상을 갖췄다.”

덩샤오핑에게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너를 좀 무서워한다. 겉보기에는 부드럽지만, 속에 무시무시한 쇠뭉치를 감춘 흉악하고 음흉한 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사람은 누구나 결점이 있기 마련이다. 결점을 숨길 줄도 알아야 한다. 서서히 고치도록 해라.” 그 후 덩샤오핑은 몇 번 죽을 뻔하다 살아남았다. 염라대왕 문턱까지 몰아넣은 사람도 마오쩌둥이었고, 구해 준 사람도 마오였다. 인재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덩샤오핑도 1992년 1월 남방 순시 중, 경제특구 선전에서 인재 발굴과 양성을 강조했다. 1월 19일, 선전역 플랫폼은 새벽부터 술렁거렸다. 오전 9시 정각, 덩샤오핑의 전용열차가 도착했다. 중공 광둥(廣東)성 서기와 선전시 서기가 88세의 노인을 영빈관으로 안내했다.

1층 거실에 자리 잡은 덩샤오핑에게 시 관계자가 입을 열었다. “먼 길을 오셨습니다. 객실에서 휴식 취하신 후에 준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덩샤오핑이 팔을 휘저었다. “8년 만에 선전에 왔다.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그간 어떻게 변했는지 먼저 봐야겠다”며 벌떡 일어섰다. 차량이 도착할 때까지 정원을 산책했다.

시내를 한 바퀴 돈 덩샤오핑은 만족했다. 흥분을 숨기지 않았다. “특구를 처음 만들 때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를 도입하려 한다며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선전의 건설은 그간 우려하던 소심한 사람들을 안심시키기에 충분하다. 무슨 일이건 대담해야 한다.”

외국의 경험도 강조했다. “일본과 한국, 동남아 일부 지역 등 발전한 나라들은 고속으로 발전한 시기가 있었다. 지금 우리도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국제 환경도 유리하다. 사회주의 제도는 강한 집중력이 특징이다. 큰일 치르기에 적합하다. 속도를 더 내라.”

의미 심장한 말도 했다. “현재 우(右)라는 물건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좌(左)라는 물건도 있다. 좌는 뿌리가 깊다. 정치가나 이론가 중에 우는 안 되고 좌라야 한다는 사람이 많다. 좌에는 혁명이라는 색채가 스며들어 있다. 좌로 기울면 기울수록 더 혁명적이 된다. 좌라는 물건이 우리 당의 역사를 소름 끼치게 한 적이 많다. 꼭 있어야 할 좋은 물건들이 좌라는 물건에 의해 하루 아침에 날벼락을 맞았다. 우는 사회주의를 매장시킬 수 있다. 좌 역시 사회주의를 매장시킬 역량이 충분하다. 중국은 우를 견제해야 하지만, 좌를 방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큰 착오 범하지 않으려면 두뇌가 맑아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하기가 수월하다.”

덩샤오핑은 광둥에 애정이 많았다. 정계복귀 후, 중국의 새로운 지도부와 광저우를 방문한 덩샤오핑(오른쪽 넷째). 1979년 봄, 광둥성 광저우 영빈관. [사진 김명호 제공]

덩샤오핑은 광둥에 애정이 많았다. 정계복귀 후, 중국의 새로운 지도부와 광저우를 방문한 덩샤오핑(오른쪽 넷째). 1979년 봄, 광둥성 광저우 영빈관. [사진 김명호 제공]

이튿날 국제무역센터를 찾았다. 30여 분간 간부들에게 인재 양성을 당부했다. “관건은 사람이다. 인재를 발굴해야 한다. 현재 중앙에 있는 사람들은 나이가 너무 많다. 60여 세면 젊은 축에 속한다. 10년은 더 일할 수 있지만 20년 후면 80세를 넘는다. 내 경우만 봐도 유유자적하기엔 문제 없지만 일하기에는 정력이 딸린다. 나 같은 노인들은 새로운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고, 겸허하게 도움이나 주면 된다. 지금 부지런히 사람을 찾고 있다. 더 젊은 동지들을 발탁해서 잘 교육시켜야 한다. 그들이 제대로 성장해야 우리가 마음을 놓을 수 있다.” 중앙의 원로들에게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자신도 예로 들었다. “나는 29살 때 높은 지위에 올랐다. 지금 너희들보다 아는 게 없을 나이였다. 마오 주석에게 시키는 거나 제대로 하라며 꾸지람도 많이 들었다.”

중국식 사회주의의 특징과 개방지역에 대한 희망과 우려도 피력했다. “20년 후면 광둥은 아시아의 다른 용(龍)들을 추월할 수 있다. 경제만 중요한 게 아니다. 사회 질서와 기풍도 잘사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개방 이후 일부 지방에서 마약, 매음, 경제범죄 등 추악한 일들이 벌어진다. 더 퍼지지 못하도록, 철저한 타격을 가해야 한다. 생산력 증대와 정신문명 건설, 이 두 개를 추구하는 것이 중국식 사회주의다.” 선전 시찰을 마친 덩샤오핑은 주하이(珠海) 특구로 방향을 틀었다. 국가주석 양상쿤(楊尙昆·양상곤)이 일행에 합류했다. 시찰 규모가 더 커졌다.

이날 덩샤오핑의 발언을 계기로 젊은 간부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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