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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 2035

나의 소심한 해방놀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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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홍상지 기자 중앙일보 기자
홍상지 사회2부 기자

홍상지 사회2부 기자

2~3주 전의 일이다. “쇼핑하러 가자”던 친구는 남성 속옷이 진열된 매대로 향했다. 그곳에서 사각 모양의 드로어즈 팬티 몇 장을 골랐다. ‘남자친구 선물인가’ 싶었는데 자기가 입을 거란다.

그로부터 며칠 뒤 친구는 “나 진짜 억울해”라고 토로했다. 이렇게 몸에 편한 속옷이 있다는 걸 여태껏 모르고 산 것이 억울하다는 얘기였다. 격한 반응에 마음이 동한 나는 바로 그가 고른 것과 똑같은 종류의 속옷 몇 장을 온라인으로 구입했다. 여성용 속옷이 불편하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도 막상 남자 속옷을 입어 보니 신세계였다. 무엇보다 살에 닿는 면의 감촉이 좋았고 착용감도 편안했다.

동시에 묘한 해방감까지 찾아왔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을 때 온종일 나의 상의를 조여 온 브래지어 훅을 탁 푸는 듯한 느낌이랄까. 남성 팬티를 입어 본 건, 내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여러 요소 중 딱 하나 정도만 티 안 나게 바꿔 본 행위였다.

이거야말로 나의 작은 ‘해방놀이’다. 리본 머리끈, 딱 붙는 핑크색 티셔츠, 레이스 속옷처럼 여성이기에 익숙하지만 조금은 불편을 느꼈던 아이템을 한 번쯤 벗어 두고 나만 아는 소심한 저항을 해 보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의 한 비영리단체는 ‘핑크 택스(Pink tax)’라는 운동을 벌였다. 의류나 미용용품의 제조원가가 거의 동일해도 남성용보다 여성용에 더 비싼 가격표가 붙는 데 대한 항의였다. 여성이 남성과 유사한 품질의 상품을 사용하면서 매년 평균 2000달러 이상 더 지불한다고 이 단체는 분석했다. 남성 팬티를 처음 입은 친구의 억울한 감정은 과장이 아니었다. (게다가 천도 여성용 팬티보다 남성용에 더 많이 들어가지 않나!)

안타까운 건 나의 해방놀이는 늘 소심하게 끝을 맺는다는 점이다. 이번 추석에 남성 속옷을 입고 큰집에 간 나는 부엌에서 음식 준비에 분주한 여자 어른들, 같은 시간 거실 소파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남자 어른들을 보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괜히 한마디했다가 명절 분위기라도 깨면 어쩌나 싶었다.

태어난 지 100일 갓 넘은 남자 조카애 선물은 뭘로 할까 고민하다 결국 파란색 모자를 골랐다. “남자아이는 핑크보다 블루죠”라는 점원 말을 애써 무시하고 다른 색깔을 만지작거리다가 행여 부모가 싫어할까 싶어 마음을 바꿨다.

아무도 모르는 해방놀이는 즐거우면서 조금은 허무하고 외롭다. 늘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용기를 내 이 글을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홍상지 사회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