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선 2035

나팔바지가 씁쓸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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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노진호
노진호 기자 중앙일보 대중문화
노진호 문화부 기자

노진호 문화부 기자

‘충격적인 1985년 홍대·이대 거리’ 영상이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퍼지고 있다. 적지 않은 이들이 30여 년 전 모습은 얼마나 다를까 호기심에 영상을 접했다가 깜짝 놀란다. 흰 바지에 빨간 민소매를 받쳐 입은 모습 등 패션이 지금과 흡사해서다. 달라진 건물과 녹색 택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이가 없다는 것 외에는 낯선 장면이 없다.

보잉 선글라스(소위 잠자리 안경)나 찢청(찢어진 청바지) 같은 패션뿐 아니라 흑백필름 카메라와 롤러 장 등 80년대 문화가 다시 소환되는 요즘이다. 최근 만난 친한 여동생이 나팔바지를 입고 왔길래 물어 보자 “이번 여름까지만 해도 나팔바지가 유행”이었단다. 그러고는 이제 허리띠를 길게 늘어뜨리는 스타일이 또다시 유행이라고 한다. 벨트를 길게 늘어뜨리는 건 힙합 스타일이 유행한 10여 년 전 얘기 아닌가. 요새처럼 유행이 빨리 돌고, 80년대 고도성장기 문화가 수시로 트렌드로 자리 잡는 시대가 있었나 싶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를 씁쓸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어제만 해도 두 번째 직장을 2년째 다니는 친구가 다른 직장에 경력직 지원서를 써 낼지 고민을 토로했다. 대학 시절 대출받은 학자금 2000만원 중 절반 정도를 갚은 후배 한 명은 1년 다닌 회사를 추석 전에 그만두고 이번 주부터 새 회사로 출근하고 있다. 둘 다 박봉과 불안한 회사 상황에다 비전을 보여 주는 상사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나름 번듯한 대학을 누구보다 열심히 다닌 이들인데 30대에 접어든 지금도 안정된 직장을 찾지 못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나팔바지 입고 보잉 선글라스 쓰며 거리를 누빈 이들의 발에 차인 건 대학 학과사무실에 놓인 대기업 취업 추천서였다고 한다. 시국 집회·시위에 가담하든, 취미생활에 몰두하든 졸업 후 미래는 대체로 문제 없었다. 보잉 선글라스와 나팔바지가 다시 유행이라고 이를 걸치고 다닌다 한들 그 옛날의 낭만까지 소환될 리 없다. 눈앞의 현실은 자꾸만 늦어지는 사회생활과 내 집 마련이다. 나의 씁쓸한 느낌은 이 간극이 되짚어 준 현실 때문인지 모른다.

수요를 끊임없이 이끌어 내야 하는 자본주의 속성상 필수 요소의 하나가 유행이다. 유행이 어느 때보다 빨리 돌고, 그 유행이 과거 향수를 계속 자극하는 건 그만큼 먹고살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전인권 노래 ‘돌고 돌고 돌고’의 가사처럼 ‘어두운 곳 밝은 곳도 앞서가다 뒤서다가 다시 돌고’ 옛날 호시절까지 다시 오면 좋을 텐데…. 아, 그러고 보니 이 노래도 80년대 거구나. 이래저래 씁쓸한 요즘이다.

노진호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