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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사냐, 자살이냐’ 4억 보험금 두고 유족-보험사간 다툼…법원 판단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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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본 기사와 관계없음. [중앙포토]

사진은 본 기사와 관계없음. [중앙포토]

지난해 6월 어느날 새벽, 두 자녀와 아내가 있는 이모씨가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 건물 6층 외부 계단에서 떨어졌다. 이씨는 해가 뜨기 전 숨졌다. 부검 결과 사인은 추락 등 거대한 외력이 가해지는 경우 발생하는 ‘다발성 손상’. 유가족이 된 아내와 자녀들은 다음 달 이씨가 6년 전부터 계약을 맺어온 M보험회사에 보험금을 달라고 청구했다. 총 4개 계약을 통해 이씨의 사망으로 가족들이 받을 수 있는 돈은 4억 4000만원에 달했다.

계단 난간서 발견된 '수상한 노끈' #보험사 "자살 추정…지급사유 아냐" #법원 "정황상 자살 입증 안돼…" #보험금 4억4000만원 지급 판결

그런데 M보험사는 보험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며 보험금을 주지 않았다. "이씨가 우연한 사고로 숨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므로 보험계약에서 정한 보험사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유가족들은 보험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고 해가 바뀐 뒤 재판이 시작됐다.

사건 전날 저녁 이씨는 회사 건물 1층에 있는 순댓국집 주인과 다퉜다. 경찰관이 출동해 사건이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이씨가 지구대에 찾아가 경찰관에게 욕설을 하는 바람에 다음날 새벽이 되도록 경찰 조사를 받았다. 조사를 받고 돌아온 이씨는 다시 순댓국집을 찾아가 술을 마셨다. 사망 당시 이씨의 혈중알콜농도는 0.125%였다.

이씨의 사망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이씨는 건물 6층까지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통해 이동했다. 이씨의 회사는 7층에 있었다. 외부 계단에는 콘크리트 외벽 위로 철제 난간이 있었는데 여기에 동그란 모양으로 묶인 노끈이 걸려 있었다. M보험사는 이 노끈에서 이씨의 DNA가 검출된 것 등을 토대로 “이씨가 노끈을 묶어 자살을 시도했다 포기하고 뛰어내린 것이다”고 주장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36부(부장 설민수)는 M보험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지난달 13일 “4억 4000만원을 이씨의 부인과 두 자녀들에게 각각 1.5:1:1의 비율로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노끈이 동그란 모양으로 묶여 있기는 하나 그 모양과 크기 등에 비추어 반드시 자살할 용도로 묶은 것이라 단정하기 어렵고, 노끈에서 이씨의 DNA가 검출됐다고 해서 반드시 노끈을 묶은 사람이 이씨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또 “이씨의 목 부위에 외상이나 노끈의 섬유성분이 검출되지 않았고, 노끈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포기한 것이라면 보다 신체적 충격이 강한 추락의 방식을 택한 것은 이례적이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M보험사는 이 판결에 항소했다.

보험사와 유족이 ‘자살이다, 아니다’를 각각 주장하며 다툴 경우 입증해야 하는 책임은 보험사에 있다. “보험회사가 보험금 지급책임을 면하려면 '피보험자가 고의로 자신을 해친 경우'라는 사실을 유서 등 객관적인 물증의 존재나 일반인의 상식에서 자살이 아닐 가능성에 대해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 않을 만큼 명백한 주위 정황사실을 통해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 판례다.

이씨는 사건 전달부터 재산 상속 문제 등을 두고 형과 갈등이 있긴 했지만, 재판부는 그 정도로 “가족 간의 불화나 경제적 곤궁상태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신장이 172cm인 이씨가 취한 상태에서 1m가 조금 넘는 철제 난간에 기대었다가 실수로 몸의 균형을 잃어 추락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서 “게다가 이씨는 사고 전날 오후 딸과 통화하면서 ‘충남 태안으로 가족여행을 가자’고 했는데 이는 자살을 결심한 사람의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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