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고란의 어쩌다 투자] “은행은 비트코인을 두려워한다”…월가가 암호화폐 공격하는 까닭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08년 9월 15일.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가 파산을 신청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이 ‘거인’을 쓰러트렸다.

[사진 비즈니스인사이더]

[사진 비즈니스인사이더]

리먼브러더스를 신호탄으로 금융권 전반에 충격이 번졌다. 미국 내 5대 저축은행인 워싱턴 뮤추얼이 파산했다. 보험사 AIG도 붕괴를 목전에 뒀다. 월스트리트 전체가 무너질 판이었다.

다이먼 JP모건 회장 “비트코인은 사기” #JP모건은 FRB 주주…달러 수호 위해 공격 #부테린 “암호화폐, 법정화폐 대체 못해” #현대판 노스트라다무스 “법정화폐가 사기 #암호화폐가 은행을 쓸모없게 만들 것”

미국 재무부와 연방준비은행(Fed) 등 금융당국이 글로벌 ‘자본의 심장’ 월스트리트 구하기에 나섰다. 7000억 달러 규모의 부실자산매입 프로그램(TARP)을 통한 구제금융을 발표했다. 미국인들은 들끓었다. 세금으로 월스트리트의 탐욕적 자본가를 살려준다고 비판했다. “메인 스트리트(평범한 미국인)의 돈으로 월스트리트에 선물을 주는 격”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견고할 것 같았던 자본주의 시스템에 균열이 생겼다. 기득권들이 장악한 기존의 금융시스템과 화폐제도에 대한 반성이 일었다. 그리고 이듬해 세상에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사람이 내놓은 탈중앙화 암호화폐인 비트코인이 탄생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관심 가졌던 비트코인은 1일(오전 2시 현재) 시가총액 720억 달러(1비트코인당 4350달러) 시장으로 커졌다. 이후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 이더리움ㆍ리플ㆍ비트코인캐시 등 암호화폐 전체 시가총액은 1480억 달러가 넘는다.

문제는 앞으로다. 지금보다 가치가 더 올라갈 거라고 믿는 이들이 늘어났다. 기존 법정화폐를 대체할 거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은행으로부터 자유로운 은행을 꿈꾸는 암호화폐 기술까지 생겨났다. 2008년 이후 ‘공공의 적’ 신세에서 겨우 벗어나는가 싶었던 월스트리트에는 재앙이다. 자신들의 권위, 혹은 밥그릇을 뺏을 수 있는 싹을 잘라야 한다.

◇JP모건은 달러 찍는 은행의 주주다?

“비트코인은 사기다.”

암호화폐에 대한 공격의 포문을 연 월스트리트 인사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다. 9월 12일(현지시간) 뉴욕에서 개최한 투자자 컨퍼런스에서 비트코인에 대해 “거품은 언젠가 꺼지게 될 것”이라며 비트코인이 높은 인기를 누리는 것은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버블’보다 나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열흘 뒤(9월 22일)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투자 컨퍼런스에 참석해선 “비트코인을 비롯한 암호화폐가 점점 세를 불리면 결국 각국 정부가 이를 불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암호화폐는 무(無)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내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암호화폐는 결국 좋지 않게 끝날 것”이라고 단언했다.

다이먼의 이같은 암호화폐에 대한 공격은 처음이 아니다. 2015년 비트코인 가격이 400달러 이하일 때에는 비트코인을 “시간 낭비”라고 폄하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선 “비트코인을 지지해줄 만한 세력은 전혀 없다”며 “시장이 커지면 정부가 이를 금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암호화폐 전문가들이나 암호화폐에 투자한 벤처투자자들로부터 비난이 쏟아졌지만, 월스트리트를 수호해야할, 혹은 수호하려는 인사들은 다이먼 회장을 두둔하고 나섰다.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모델이 된 조던 벨포트는 미국 온라인 경제매체 더스트리트와의 인터뷰에서 “다이먼이 ‘비트코인은 사기’라고 한 말을 나 역시 믿는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에서 돈을 버는 과정에서 법을 어겨 결국 감옥에 가야했지만 어쨌든 그의 고향은 월스트리트다. 위협 받아서는 안 된다.

영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영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앞서 2014년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 버크셔헤서웨이 회장도 “비트코인은 신기루”라고 말했다. 가치 투자를 철칙으로 삼아 닷컴 버블 때에도 기술주 투자를 안 했던 사람이니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비트코인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쉽게 수긍이 간다.

그러나 JP모간 같은 투자은행이나 벨포트 같은 인물은 성장 가능성, 극단적으로는 인간의 투기 욕망에 베팅하며 돈을 벌어들인다. 그런데도 최근 인간 욕망의 집약체인 암호화폐에 대해선 날을 세운다.

JP모간이 기존 법정화폐 시스템을 수호했을 때 얻는 이익이 더 크기 때문이다.

지금의 달러 시스템 하에서 가장 큰 이익을 얻는 집단은 미국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ㆍFRB)이다. 미국 정부는 돈이 필요하면 재무부가 채권을 발행하고 이걸 FRB에 준다. FRB는 채권에 해당하는 만큼의 달러를 찍어내 미 정부에 보낸다(물론, 실제 화폐가 오가는 것은 아니다. 장부상의 숫자만 바뀔 뿐이다. 미국 달러 지폐의 상단에는 ‘Federal Reserve Note’라고 씌어 있다). 그럼 FRB는 이 국채를 대형 민간은행에 팔아 수익을 거둔다.

1달러 지폐

1달러 지폐

달러라는 법정화폐의 독점적 발권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FRB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 돈을 번다. 대신 FRB가 번 돈만큼은 미 정부의 빚, 곧 미국인들의 빚이 된다. 달러는 빚으로 이뤄진 화폐다. 미국 온라인매채 이코노믹컬랩스에 따르면, FRB 창설(1913년) 이래 달러의 가치는 대략 98% 하락했다. 1910년 26억달러에 불과했던 연방정부 부채는 현재 20조 달러에 이른다.

그런데 FRB는 다른 나라의 경우처럼 정부가 소유한 중앙은행이 아니다. 민간은행들 소유다. 주주 명단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FRB 설립 당시 JP모건도 이름을 올린 걸 감안할 때 JP모건이 FRB의 주주일 것으로 대개 추정한다. JP모건의 회장이 앞장서 법정화폐를 위협하는 암호화폐를 공격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은행은 암호화폐를 두려워한다”

다이먼은 암호화폐를 공격하면서 그 근거로 “화폐는 지불 능력이 있어야 하고, 지불 비용이 매우 적게 들어야 하며, 이동도 아주 쉬워야 한다”며 “JP모건은 매일 전세계에 걸쳐 6조 달러를 움직이고 있고, 아주 효율적으로 조용하게, 그리고 아주 값싸게 움직인다”고 강조했다.

다이먼의 이런 주장은 “암호화폐가 법정화폐를 대체할 것”이라는 예측에 대한 반박이다. 그러나 암호화폐 관련자들이나 옹호론자들조차도 이들의 이런 전제에는 동조하지 않는다.

시가총액 2위 암호화폐 이더리움을 만든 비탈릭 부테린은 최근 방한해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암호화폐를 보는 견해를 3가지로 정리했다. 먼저, 주식ㆍ채권ㆍ금 등과 같은 새로운 종류의 자산으로 보는 시각이다. 둘째는 새로운 교환의 수단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국에는 법정화폐를 대체할 거라고 보는 견해다.

이더리움(Ethereum)을 만든 비탈릭 부테린(Vitalik Buterin)이 24일 서울 코엑스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이더리움은 가상화폐의 한 종류로, 맏형 비트코인에 이어 2위 가상화폐로 평가 받고 있다. 조문규 기자.

이더리움(Ethereum)을 만든 비탈릭 부테린(Vitalik Buterin)이 24일 서울 코엑스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이더리움은 가상화폐의 한 종류로, 맏형 비트코인에 이어 2위 가상화폐로 평가 받고 있다. 조문규 기자.

부테린은 그 가운데 세 번째 시각은 틀렸다고 단정했다. 그는 “암호화폐는 변동성이 너무 커서 법정화폐를 대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부테린은 “회계나 화폐 단위로서의 화폐는 암호화폐보다는 훨씬 더 안정적이어야 한다”며 “암호화폐 시장이 커지면서 변동성이 지금보다는 줄겠지만 여전히 주식시장의 변동성 정도는 유지할 것이기 때문에 법정화폐를 대체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는 “언론이 암호화폐 등 새로운 기술이 법정화폐 등 구체제를 위협할 거라고 선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다”며 “지난번 미국 샌프란시스코 행사(미국 IT 매체 테크크런치가 18일 주최한 ‘디스럽티브 샌프란시스코’) 때 ‘이더리움이 2~3년 내 비자의 결제 처리 속도보다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더니 언론은 ‘이더리움이 2~3년 내 비자를 대체할 것’이라고 보도했다”고 말했다.

제럴드 셀렌테 ‘트렌드 저널’ 발행인은 월스트리트의 엘리트들이 암호화폐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은행이 비트코인(암호화폐)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1987년 블랙 먼데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예측해 ‘현대판 노스트라다무스’라는 별칭을 얻은 트렌드 예측가이자 애널리스트이다.

&#34;법정화폐(&#39;In God We Trust&#39;는 달러에 들어간 문구)는 죽었고, 비트코인이 미래다&#34;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제럴드 셀렌테. [사진 더스트리트 캡쳐]

&#34;법정화폐(&#39;In God We Trust&#39;는 달러에 들어간 문구)는 죽었고, 비트코인이 미래다&#34;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제럴드 셀렌테. [사진 더스트리트 캡쳐]

셀렌테는 최근 더스트리트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최근 법정화폐가 사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비트코인에서 밝은 미래를 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은행들은 비트코인이 ‘사업을 뺏어갈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며 “비트코인이 은행을 쓸모없게 만들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러한 공격(다이먼의 폄하 발언)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주류는 아니지만 월스트리트에서도 암호화폐를 수용하자는 쪽도 있다. 모건스탠리의 제임스 고먼 CEO는 최근 “비트코인은 일시적인 유행이라고 하기엔 조금 다른 성질을 띤다”며 “비트코인은 투기적이기는 해도 그를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으며 블록체인 기술을 감안한다면 자연스러운 특성이다”고 말했다.

미국의 대형 펀드 회사인 피델리티의 애비게일 존슨 CEO는 훨씬 적극적이다. 그는 최근 “우리는 가상화폐시장의 지속 성장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며 “피델리티는 가상화폐 마이닝(채굴) 사업을 통해 이 시장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