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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었다. 여행을 하고 싶어서…" 말기암 이겨낸 나의 '여행 버킷리스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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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믿었어요. 갑자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이대로 죽는건가. 그냥 앞이 캄캄했습니다.” 

이정훈(36)씨는 눈물을 참았다. 2015년 7월, 대기업에서 사내벤쳐 관련 일을 하던 이씨는 배가 자주 아팠다. 처음에는 스트레스성 위염인 줄 알았다. 동네 병원에 가고, 약을 먹으며 버텼다.

바쁜 업무로 미뤄왔던 종합건강검진을 받으러 간 병원에서 “심상치 않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위암인 줄 알았다. PET-CT 결과를 보니 수술할 수 없는 상태라는 말을 들었다. 다음 날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다. 버킷림프종 혈액암 말기. 8개월 전 종합검진에서 아무 이상도 없던 그가, 두 달 전 마라톤을 뛸 정도로 건강했던 그가 암 말기 선고를 받았다.

이정훈씨 체내 퍼진 암세포. 검은 부분이 암세포다. [이정훈씨 제공]

이정훈씨 체내 퍼진 암세포. 검은 부분이 암세포다. [이정훈씨 제공]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다. 그저 살고 싶었다. 혈액암 말기는 상대적으로 생존가능성이 높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항암치료 3일만에 10㎏이 빠졌다. 74㎏던 몸무게는 2주만에 50㎏가 됐다. 평소 손가락으로 들 수 있던 물건은 두 손으로 들어야했다. "머리카락을 빠짝 밀었는데, 자고 일어나면 짧은 머리카락들이 빠져 베개에 박혀있었어요. 세수를 할 때 스치는 머리들도 다 빠지고. 그러다 거울을 보면 내 몰골이 보여요. 살고 싶었어요. 아직 못해본 것들도 많고. 이대로 죽긴 억울했어요."

혈액암 투병 시절의 이정훈씨. [이정훈씨 제공]

혈액암 투병 시절의 이정훈씨. [이정훈씨 제공]

2차 항암스케줄을 지날 때 희망이 보였다. 암세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아지기 시작했는데, 약이 독해서 추석 직전에 위 천공이 왔어요. 산다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이구나 싶었죠.”

죽음 보다 삶이 더 가까워졌다. 항암치료가 효과를 보이고, 거동이 편해질 무렵 의사의 허락을 받아 시골로 요양을 떠났다.

걷다보니 다리에 근육도 생기고 머리카락도 더 잘 자라는 느낌이었어요. 어느 날 자려고 누웠는데 너무 여행을 가고 싶었어요. 문득, 나같은 암환자도 여행 버킷리스트를 만들면 의지를 갖고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2015년 11월말, 5개월의 항암치료를 마친 이씨는 퇴원 직후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병상에서 계획한 미국 여행을 다녀왔다. 현재 완치수준인 그는 정기적으로 추적검사를 받는다. 몸무게도 60㎏대가 됐다.

퇴원한 이후의 이정훈씨. [이정훈씨 제공]

퇴원한 이후의 이정훈씨. [이정훈씨 제공]

건강이 나아지자 회사에 복직한 그는 지인들과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사람들을 모았다. '젊은 암환자를 위한 여행 프로젝트'준비를 시작했다.

국내 20~30대 암환자는 증가 추세다. 국립암센터 등이 발표한 '2014 암등록통계'에 따르면 20~29세 10만명당 암환자는 66.2명(2004년)에서 110명(2014년)으로, 30~39세는 204.1명(2004년)에서 336.7명(2014년)로 증가했다.

2016년 12월부터 모인 이들은 14명. 약사·선생님·사진작가 등 직업도 다양하다. 격주 목요일 오후 8시에 다같이 모여 3시간씩 기획 회의를 한다.

“암 환자들은 항암치료 부작용으로 장시간 책 읽는 게 쉽지 않아요.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과 짧은 에세이들을 통해 독자와 암환자들이 여행 버킷리스트를 만들 수 있게 여행 포토북을 제작중입니다.”

올해 12월 출간이 목표다. 독자가 1부를 사면 암환자에게 1부를 기부한다. 현재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 3만여 장을 모아 선별 및 디자인 작업중이다. 클라우드 펀딩도 할 계획이다. 장기적으로 여행 버킷리스트를 작성한 암환자가 완치될 경우 여행비를 지원하고, 암치료자의 복직을 돕는 아이디어도 구체화하고 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의지를 얻고, 암 투병을 견딘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가고 싶은 곳을 향한 열망이 저를 살렸던 것처럼요.”

그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암환자로서 힘든 것 중 하나는 알고 지내던 이들이 날 다르게 대할 때 였어요. 평소대로 대했으면 하는데 동정하고 안타까워하고 돌아가면, 남아있는 저는 기운이 빠지더라구요. 암환자들에게 투병 이전처럼 대해줬으면 해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점심시간에 인터뷰를 마친 이씨는 회사로 들어갔다. 투병시절, 그가 그토록 바라던 일상이 있는 곳이었다.

여성국 기자 yu.sungk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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