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워싱턴에서 드러난 총체적 외교안보 난맥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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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현지시간) 워싱턴 주미대사관에서 열린 강경화 외교장관의 기자간담회에선 기이한 두개의 장면이 연출됐다.

외교부 고위 관계자, "B-1B 동행 지나치게 자극적이라 우린 빠졌다" #국방부 언급도 않았는데 '국방부 설명대로' 돌출 발언 #문정인 특보의 "틸러슨이 강력 항의" 발언에는 "동의 못한다" #배석한 북미국장은 기자 질의 도중 "답할 필요 없어" 끼어들어 #이게 과연 역사적 위기 속 대한민국 외교안보의 민낯인가

첫째는 간담회장에서의 발언. 30여 분간의 간담회에서 외교 고위관계자는 "한국과 미국은 외교적으로, 군사적으로 잘 조율하고 있다"고 반복해 강조했다. 돌발발언은 미국 측의 군사옵션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나왔다. 그는 "이번에 폭격기(B-1B 랜서 전략폭격기)의 (북한) NLL(북방한계선) 북쪽 공해상에서의 비행에 대해서도 우리 측에 사전협의와 통보가 있었다"고 운을 땐 뒤 "국방부 쪽에서 설명한 걸로 아는데, 우리(한국)로선 거기(미 폭격기 비행)에 동행하는 부분에 있어선 그것이 너무 지나치게 자극적일 수 있기 때문에 빠졌다"고 설명했다.
국방부는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지금까지 그런 발표를 한 적이 없다. 국방부는 "충분한 사전조율과 긴밀한 공조 하에 이뤄졌다"는 원론적 언급만 해 왔다. 간담회에 나선 이 고위관계자는 "미국이 다시 북한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우리 측에 작전 동행을 요청할 수 있을텐데"란 질문에 또다시 "우리로선 '빠진다'라고 하는 판단이 있었던 것"이라며 "그것도 상황 관리의 일부다"라고 덧붙였다. 이어지는 질문에는 "국방당국 간 협의에 대해 세부사항까지 파악하고 있지 않다. 기밀사항으로 남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주무부처인 국방부나 청와대도 사안의 민감성을 감안해 극도로 발언을 자제하는 가운데 외교부가 "(우리 판단에 따라) 빠졌다"는 사실관계 및 '빠진 이유'까지 털어놓은 셈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27일 강 장관 간담회에서의 이 발언에 대해 "국방부에선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즉각 반박했다. 워싱턴발 외교부-국방부 엇박자다.  이와 함께 외교부-대통령 외교안보특보의 엇박자, 아니 거짓말 공방도 있었다.

이달 초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현안 보고를 하고 있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중앙포토]

이달 초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현안 보고를 하고 있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중앙포토]

소재는 문정인 특보의 26일(한국시간) '10.4 남북정상선언 10주년 기념식' 특별강연 발언이었다. 문 특보는 강연에서 "지난 7월 문재인 대통령이 북측에 적십자회담, 군사회담을 제안한 데 대해 미국이 엄청나게 불쾌해 했었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강경화 외교장관에게 강력한 어조로 항의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외교 고위 관계자는 "(문 특보의 주장에)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다면 같은 사안을 두고 문정인 특보가 거짓말을 했다는 말이냐"는 질문에 "특보가 어떤 배경에서 그런 발언을 했는 지는 특보에서 물어봐야 할 것 같다"고 받아쳤다. 틸러슨 장관의 대화 상대는 강경화 장관인 만큼 강 장관 본인이 상황을 가장 잘 안다는 뉘앙스였다.
 이 고위 관계자는 다만 "외교채널로 설명한 부분이 충분히 전달이 안 된 상황에서, 부족한 부분에 대해선 주말이 지나 틸러슨 장관에게 추가적 설명을 했고 틸러슨은 충분히 이해를 했다"며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시사했다.
송영무 국방장관의 문 특보에 대한 "개탄스럽다" 발언→청와대 경고→송 장관 사과 파동이 일단락 되는가 싶더니 또다시 외교부 수뇌부의 워싱턴 발언으로 외교안보라인의 엇박자가 불거져나온 것이다.

이날 수뇌부만 삐걱거린 게 아니다. 간담회에 배석한 조구래 북미국장은 간담회 말미에 한 기자가 "북미 간 말폭탄 싸움으로 인한 긴장 상황을 관리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미국 측과 어떤 논의를 했느냐"는 질문을 하고 있는 도중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강 장관쪽으로 걸어가며 "답할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강 장관은 답변을 시작했다. 이때 다른 기자가 "기자가 질문하는 데 옆에서 당국자가 '답할 필요없다'고 하는 게 무슨 소리냐"고 항의하자 조 국장은 자리에 앉은 채 손사래를 치며 답을 피했다. 당시 장면은 강 장관이 간담회 뒤 열차 편으로 뉴욕으로 이동해 서울행 비행기를 타는 일정이 있어 서두르는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장관'이 답변을 회피하지 않고 있었고 안호영 주미대사 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도 국장급 인사가 "답할 필요가 없다"며 장관을 향해 뛰쳐나갔다. '외교부 개혁'은 고사하고 '안하무인 외교부' 의 모습이었다. 박근혜 정부에서 승승장구했던 조 국장은 지난 5월 새 정권 특사단 방미 당시의 특파원 간담회에서도 급증하는 여성 외교관에 대한 인사 및 순환근무 대책을 묻는 질문에 "그건 자기들이 알아서 해야죠 뭐"라고 답해 구설에 오른 바 있다. 현재 외교부의 또 다른 국장급 인사도 '성차별 발언' 논란으로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외교부 감사관실의 조사를 받고 있다. 이날 워싱턴 주미대사관 간담회장에서 본 건 한국 외교안보의 총체적 난맥상이었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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