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北, 공역서 B-1B 격추가 유엔 헌장상 자위권?

중앙일보

입력

이용호 북한 외무상은 25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미국의 선전포고’를 이유로 미 전략 폭격기를 격추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자위권’을 내세웠다. “유엔 헌장은 개별적 성원국의 자위권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트럼프 “北 완전파괴” 때보다도 강한 반발, 왜?=이 외무상은 격추까지 언급한 근거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23일(현지시간) 트윗을 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을 ‘리틀 로켓맨’이라고 칭하며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 내용만 보면 트럼프 대통령의 19일 유엔총회 기조연설 발언이 더 위협적이었다. “미국과 동맹을 방어해야 한다면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 외엔 다른 선택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외무상은 이에 대해 “우리에 대한 군사적 공격 기미가 보일 때는 가차 없는 선제행동으로 예방조치를 취할 것”(23일 총회 기조연설)이라고 했다.

그런데 25일엔 “미 전략 폭격기가 북한 영공으로 진입하지 않아도 격추하겠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완전 파괴’보다 ‘오래 가지 못할 것’이란 말에 반응 수위가 더 높았던 셈이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북한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란 말을 어떤 방법으로든 김정은 체제를 끝내겠다는 메시지, 최고존엄에 대한 모독이자 북한이라는 국가 체제 자체를 거부하는 듯한 말로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 헌장이 ‘격추 자위권’ 보장?=유엔 헌장 2조 4항은 ‘모든 회원국의 무력 위협이나 무력  행사’를 금지하고 있지만, 51조는 자위권 행사에 한해 예외를 인정한다. 이 외무상의 말 자체가 틀리진 않았다.

하지만 51조는 ‘무력 공격이 발생한 경우’에만 ‘개별적 또는 집단적 자위의 고유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전제를 달고 있다. 그럼에도 이 외무상은 미 전략 폭격기가 북한 영공이 아닌 국제 공역(空域)에 있을 때도 자위권 행사 차원에서 격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창위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전시(戰時) 상태가 아니면 공역에선 자위권 행사를 할 수 없다. 이에 이 외무상이 미국이 선전포고를 했다고 자의적으로 전시로 규정하는 황당한 주장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예방적 자위권’이나 ‘선제적 자위권’이라는 개념도 성립이 힘들다.

실제 국제사회는 그간 자위권 발동 요건을 엄격하게 해석해 왔다. 국제법 학계에서는 ^일정 규모와 효과 이상의 무력 공격이 있었는지 ^자위권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는지 ^당한 공격에 비례해서 대응했는지를 중요한 기준으로 본다.

1986년 베를린의 미군 전용 디스코텍에서 테러가 발생, 미군들이 희생됐을 때 미국은 리비아를 배후로 지목하고 수도 트리폴리를 공습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도 유엔 헌장 51조를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테러가 미 영토에 대한 무력 공격이 아니었고, 공습은 과도한 대응이었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의 비판이 일었다. 유엔은 미국의 공습을 비판하는 결의도 채택했다.

◇탐지·격추할 능력은 있나?=이 외무상의 발언은 지난 23일 미국의 B-1B '랜서' 편대가 동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북한 쪽 국제 공역 깊숙이 비행한 사실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읽힌다.

북한이 B-1B 요격을 시도할 가능성은 있다. 실제 북한은 지난 1969년 4월 15일에도 청진 남동쪽 상공에서 정찰 중이던 미 해군 EC-121 정찰기를 격추한 적이 있다. 당시 북한은 서해안에서 운영 중인 최신형 전투기인 미그-21 2대를 완전히 분해한 뒤 동해안으로 비밀리에 운반해 조립했다. 미그-21 2대는 미그-15 비행훈련에 편승해 출격한 뒤 방심하던 EC-121를 기습했다.

하지만 전투기 파일럿 출신인 김형철 전 공군사관학교장은 “북한의 현재 방공 능력으로 봤을 때 B-1B 격추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의 적 방공망 제압(SEAD) 능력은 세계 최고”라고 말했다.

B-1B는 북한의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 저공으로 비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했다. 북한은 레이더를 24시간 가동하지도 않는다. 북한의 방공용 지대공미사일 가운데 가장 사거리가 긴 SA-5(최대 사거리 250~300㎞)는 원산과 사리원에 배치돼 있다. 하지만 1967년 실전배치한 것으로, 워낙 오래된 무기라 미국이 약점을 잘 알고 있다.

EC-121 격추 때처럼 전투기로 요격에 나선다 해도 미국의 상대가 안 된다. 대부분의 북한 전투기들은 낡았고 조종사의 훈련량도 부족하다. 가장 최신이라는 미그-29도 B-1B를 호위하는 F-15C '이글'을 당해낼 수 없다.

신범철 국립외교원 교수는 “북한은 능력 차원에서 미국에 직접 맞대응하기도 힘들다”며 “미국에 몰래 다가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 실험을 하는 등 새로운 유형의 전략도발을 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그래도 한다면 그 다음은?=북한이 그래도 격추를 감행한다면 우선 미국의 맞대응이 예상된다. 외교적 대응도 가능하지만, 미국도 자위권을 근거로 북한을 상대로 군사 행동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적법한 자위권 행사인지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차원의 대응도 불가피하다. 유엔 헌장 51조는 자위권을 행사한 국가는 즉시 안보리에 보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안보리가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때까지만 자위권을 행사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회원국의 자위권이 안보리의 권한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안보리는 자위권이 적절하게 행사됐는지 판단하고,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간 안보리는 핵·미사일 등 북한의 도발에 대응해 비군사적인 제재 결의를 채택해왔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군사적 조치를 규정한 유엔 헌장 42조를 적용할 수 있다.

정상 국가 간 분쟁은 통상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로 다루지만, 이는 조약 등을 통해 사전에 합의돼 있어야 가능하다. 외교관계도 없는 북·미간에는 쓸 수 없는 방법이다.

이철재·유지혜·김상진 기자 wisepe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