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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서 아이 죽는데 … 안전조례도 못 만들게 했던 헌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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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훈 기자 중앙일보 베이징특파원
김록환 기자 중앙일보 기자

내 삶을 바꾸는 개헌 ③ 중앙권력, 왜 지방으로 나눠야 하나

동네마다 한두 개씩은 있는 게 어린이 놀이터다. 놀이터의 그네와 시소가 낡아서 어린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은 중앙정부의 몫이 아니다. 1996년 부천YMCA는 지역 내 어린이 놀이터의 안전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아 부천시의회에 안전관리 조례(條例)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시의회의 답변은 “상위 법이 없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상위법 없어 낡은 시소·그네 손 못써 #문제 제기 11년 지나서야 법 고쳐져 #지역현안에 쓸 예산 부족한 지자체 #담뱃세 등 ‘악마세’ 더 걷는 방법뿐

◆안전법령 만드는 데 11년=87년 헌법은 ‘지방자치단체는 법령의 범위 안에서 자치에 관한 규정을 제정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놀이터 안전관리에 대한 상위 법령(법률이나 행정명령)이 없으니 시의회가 조례를 만들면 위헌이었다.

그사이 전국에서 사고는 계속됐다. 97년 인천의 한 아파트 놀이터에서 구름사다리가 붕괴돼 어린이 한 명이 죽었다. 2005년 부산의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선 그네가 무너져 초등학교 4학년 여아가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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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는 2007년에야 ‘어린이놀이시설 안전관리법’을 제정했다. 전국 지자체가 놀이터 시설 관리와 보수에 나설 수 있는 조례 제정이 가능하기까지 11년이 걸렸다.

지방자치는 유신 체제에서 사라졌다가 87년 헌법으로 되살아났다. 하지만 ‘반쪽의 자치’다. 87년 헌법에 따르면 지자체는 중앙정부와 국회가 정한 일만 해야 한다. ‘지자체는 법령의 범위 안에서…’라는 헌법 조항은 주민 일상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는 ‘지하층’ 건축이 고민거리다. 구릉지가 많은 서대문구엔 정면에서는 1층이지만 뒤쪽에서 보면 지하로 파묻힌 건물이 많다. 그런데 건축법 2조의 지하층 조항에 따르면 앞뒤가 다른 이런 건물도 얼마나 땅에 파묻혔는지에 따라 지하층인지 여부를 판단한다. 이 조항을 이용해 건물주는 층수를 더 늘리려 하고, 조망권에 피해를 본 주민들은 민원을 계속 제기하지만 지자체는 중앙정부가 만든 건축법 2조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은 “현장 상황과 상식에 따라야 할 문제를 건축법에 따라 전국에 일괄 적용하니 지자체로선 어찌할 방법이 없다”며 “최소한 헌법의 ‘법령의 범위 안에서’라는 문구를 ‘법령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로 완화해 지자체가 탄력적으로 조례를 제정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방은 ‘악마세’만 걷어라?=인구 87만 명인 경기도 부천시의 지난해 세입 예산은 1조6140억원이다. 이 중 시가 자체로 충당하는 수입은 지방세 등을 포함해 4092억원이다. 나머지 1조2048억원은 국고보조금·지방교부세 등 중앙정부가 내려보내는 돈이다. 이 돈은 사실상 용처가 정해져 있다. 부천시 예산법무과 관계자는 “자체 수입인 4000억원은 큰돈이지만 청사 관리비, 녹지·공원 관리비 등 이 돈으로 충당해야 할 고정 비용만 5000억원이 넘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자체가 실정에 맞게 쓸 수 있는 돈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지방세를 더 걷는 방법도 있지만 김만수 부천시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시에서 걷는 지방세는 자동차세(재산세), 담뱃세, 취·등록세 등이 대부분이다. 김 시장은 “지방은 담뱃세 같은 ‘악마세’만 걷으라는 얘기가 있다. 우리는 그간 금연 캠페인과 대중교통 이용 캠페인을 벌여 왔는데 지방세수를 늘리겠다고 흡연을 권장하고, 차를 많이 사서 타시라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세금은 크게 정부 수입인 국세와 지방세로 나뉜다. 현재 대부분의 지자체가 국세 중 일부를 지방세로 넘겨 지자체가 주민 수요에 맞게 쓸 수 있는 예산을 늘려줘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이기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개헌 시 지방에 권한을 넘겨 각 지자체가 현장에 맞는 정책을 수립하고 경쟁력을 최대화하면 결과적으로 경제 살리기에도 일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례

시·군·구 등이 제정하는 자치입법권에는 규칙과 조례가 있다. 규칙은 지치단체장이 제정하며, 조례는 지방의회에서 의결한다.

박성훈·김록환 기자 park.seongh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