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과거가 정치의 핵심이 된 이상한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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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여야가 전전(前前) 정권(이명박·MB)과 전전전 정권(노무현)의 과거사를 놓고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24일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부부싸움 끝에 목숨을 끊었다”고 주장한 정진석 자유한국당 의원을 맹공하며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나섰다. 국민의당과 정의당도 정 의원 비난에 가세하며 판을 키웠다. 이에 맞서 한국당은 “노 전 대통령 부인과 아들이 수백만 달러를 받은 게 허위 사실인가”라며 재수사를 요구했다.

자칫 전쟁까지 비화할 안보 위기에도 아랑곳없이 10년 전 과거사를 펼쳐 놓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 정치권의 구태에 어안이 벙벙하다. 비극적 최후를 맞은 전직 대통령에 대해 ‘부부싸움’ 운운한 정 의원의 태도는 바르지 못하다. 그렇다고 과거 보수 정권을 애초 ‘적폐’로 몰며 사전 각본이라도 짠 듯 일사불란하게 칼날을 들이대는 여권 행태도 문제다. 민주당이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로 MB 수사를 요구한 직후 박원순 서울시장은 MB를 고소했고, 검찰은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권력기관인 검찰과 국가정보원뿐 아니라 거의 모든 행정 부처가 적폐 청산에 매달리는 것도 우려스럽다. 통일부가 외부 인사들로 짜인 ‘혁신위원회’를 만들어 보수 정권들의 대북 정책을 점검하기로 한 데 이어 교육부는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국정교과서 추진 과정을 추적하는 진상조사위원회를 출범시킨다. 부처마다 편 갈라 과거사나 파헤치고 있을 만큼 한가한 시국인가. 또 부처 내 분열과 이반은 어쩔 텐가. 위원회를 주로 진보 성향 인사로 채운 점도 걱정이다.

전직 대통령이라도 큰 죄를 지은 혐의가 있다면 수사가 마땅하다. 그러나 요즘 여당이 의도하는 MB 수사는 같은 보수 정권인 박근혜 정부 때 파헤쳤다가 ‘혐의 없음’으로 결론 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저 보수 정부 손보기를 위해 적폐 청산을 부르짖는다면 정치보복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래 놓고 대통령이 야당 대표들을 초치해 협치를 당부한들 제대로 먹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