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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독일 … ‘NIPPON’ 유니폼 입고 1만m 올림픽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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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9호 25면

[2017 스포츠 오디세이] ‘빙판의 손기정’ 김정연 아시나요

메이지대 4학년이던 1937년, 김정연 선수가 그동안 받은 트로피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국립체육박물관 추진위]

메이지대 4학년이던 1937년, 김정연 선수가 그동안 받은 트로피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국립체육박물관 추진위]

‘저는 힘껏, 맘껏, 가슴이 아프도록 뛰엇읍니다. 뻬스트를 다하엿읍니다. 조금도 후회가 없읍니다. (중략) 그저 좀더 노력하여야 외국선수들과 억개를 겨눌수 잇겟다는 것을 자각하엿읍니다.’(동아일보 1936년 3월 11일자)

한국인 첫 동계올림픽 출전해 13위 #6개월 뒤 손기정이 마라톤 우승 #메이지대 법학과 선후배로 친분 #기사도 쓰고 서예도 능했던 멋쟁이 #자녀들이 30년간 유품 정성껏 보관 #국립체육박물관에 345점 무상 기증

이 기사는 1936년 2월 독일의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열린 제4회 동계 올림픽 빙속(스피드 스케이팅) 종목에 출전한 김정연(金正淵) 선수가 쓴 것이다. 일본 메이지(明治)대 법학과에 다니던 그는 뛰어난 스케이팅 실력으로 일본 대표팀에 선발돼 한국인 최초로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다. 출국 직전 서울에 들른 김정연에게 동아일보 사장이던 송진우가 부탁했다. “독일엔 우리 특파원이 없으니 올림픽 출전 감상과 현지 표정, 경기 진행경과 등을 기사로 써 보내 주게.”

김정연은 선수로 뛰면서 17차례나 생생한 기사를 작성해 보냈다. 위 기사는 자신의 주종목인 남자 5000m에 출전해 역주했으나 미국 선수에게 6초8 차로 진 뒤 소감과 각오를 쓴 것이다. 김정연은 이틀 뒤 열린 1만m에서 13위에 올랐는데 1위부터 13위까지가 올림픽 신기록이었다. 김정연(일본명 긴 세이엔)은 동양 선수 최초로 빙상 종목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는 족적을 남겼다.

1935년 일본에서 열린 빙속대회에서 역주하는 김정연.  [사진 국립체육박물관 추진위]

1935년 일본에서 열린 빙속대회에서 역주하는 김정연.  [사진 국립체육박물관 추진위]

그로부터 6개월 뒤인 1936년 8월 9일,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장기를 단 손기정(일본명 기테이 손)이 우승했다. 2시간 29분 19초. 올림픽 신기록이었다. 시상식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손기정은 더 유명해졌다.

손기정(1912∼2002)은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이고, 김정연(1910∼1992)의 고향은 평북 강서다. 손기정은 어린 시절 꽁꽁 언 압록강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빙상 선수를 꿈꿨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워 마라톤을 했다. 김정연은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스케이트·스키 등을 배웠고, 카메라도 다룰 줄 알았다. 1934년 메이지대에 입학한 김정연은 빙상 선수 모임인 ‘펭귄구락부’의 일원으로 손기정의 일본 전지훈련을 돕기도 했다.

‘김정연 유품’으로 10월에 전시회

김정연 선생의 3남인 김상구 선생이 부친의 유품인 벚나무 스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김정연 선생의 3남인 김상구 선생이 부친의 유품인 벚나무 스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두 식민지 청년은 6개월 시차를 두고 독일에서 열린 동·하계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출전해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는 기연(奇緣)을 맺었다. 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 다음해인 1937년 ‘마라톤을 더 이상 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메이지대 법학과에 입학해 김정연의 후배가 됐다. 두 사람은 광복 후 서울 원효로에서 이웃으로 살며 가족끼리 함께 냉면을 먹으러 갈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

김정연은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을 역임했고, 1963년에는 손기정과 함께 도쿄올림픽(1964년) 남북 단일팀을 위한 체육회담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정연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2018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빙판의 손기정’ 김정연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자녀들이 그가 남긴 유물들을 잘 보존했다가 세상에 내놨기 때문이다.

지난 6일 국민체육진흥공단 산하 국립체육박물관 추진단이 있는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비즈홀을 찾았다. 김정연 선생의 3남인 김상구(73) 선생과 막내딸 김상진(65) 선생이 나와 있었다. 이들은 선친의 유품 345점을 국립체육박물관 추진단에 무상 기증했다. 2020년 개관을 목표로 유물의 수집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추진단은 동계 종목 물품이 빈약해 고민하던 차에 ‘가뭄 끝 단비’를 만났다. 추진단의 홍인국 학예사는 “김정연 선생의 유품은 어떤 컬렉션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물품의 질과 양,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고 말했다. 국립체육박물관 추진단은 김 선생의 기증품을 중심으로 10월말에 평창 올림픽 성공 기원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김정연 선생은 8남매(5남3녀)를 뒀다. 이들은 모두 대학을 나왔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김상구 선생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판화 작가로 일하고 있다. 김상진 선생도 서양화가다. 김상구 선생은 30년 전부터 여의도 작업실에 부친의 유품을 보관하고 정성껏 관리해 왔다.

사료(史料) 차원에서 가치가 큰 유품은 당시 올림픽 1만m 경기를 녹화한 4분 분량의 16mm 영사 필름이다. 김상구 선생은 “두 명이 뛰는 경기에 상대 선수가 기권해 아버님 혼자 달리는 장면입니다. 독일에 유학 중이던 배운성 화백이 촬영한 건데, 아버님이 경기 전에 당신의 카메라를 건네주시면서 찍어달라고 부탁한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올림픽에 출전한 일본 빙상 대표팀. 맨 오른쪽이 김정연.  [사진 국립체육박물관 추진위]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올림픽에 출전한 일본 빙상 대표팀. 맨 오른쪽이 김정연.  [사진 국립체육박물관 추진위]

부친이 쓰던 스케이트 날을 보여주며 김 선생은 “이게 노르웨이 제품인데 당시 집 한 채 값이라고 들었어요. 원래 높이는 현재의 두 배 정도였는데 계속 타고 날을 갈고 하면서 마모가 심하게 됐어요”라고 설명했다. 홍 학예사는 “1930년대 만든 건데 신발은 없어지고 날만 남았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이 제품과 똑같은 모델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원래 모양대로 복원할 수 있게 됐죠”라고 말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위창 오세창(1864~1953) 선생이 써 준 글씨는 유족들이 가장 애착을 갖는 유품이다. ‘고용활약’(鼓勇活躍·북소리와 함께 용맹하고 활기차게 도약하라)이라고 쓴 이 글씨는 당시 81세였던 오세창 선생이 35세인 김정연 선수를 격려하기 위해 써 줬다고 한다.

올림픽비즈홀 지하 임시 수장고에 보관 중인 스키도 다시 꺼냈다. 미즈노에서 만든 벚나무 스키는 얼마나 보존을 잘 했는지 반들반들 윤기가 나고 있었다. 김상진 선생은 “오라버니들이 ‘아버님 유품이니 소중히 다뤄야 한다’며 손도 못 대게 했다”며 웃었다.

그의 ‘강인한 고투’ 74년 후 밴쿠버서 금3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주는 청동투구 앞에 선 손기정 선생(왼쪽)과 김정연 선생. [사진 국립체육박물관 추진위]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주는 청동투구 앞에 선 손기정 선생(왼쪽)과 김정연 선생. [사진 국립체육박물관 추진위]

김정연 선생의 유품은 보존 상태가 워낙 좋아 더욱 가치가 높다. 김상구 선생은 “아버님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잘 보존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것 자체가 다 돈입니다. 국가에서 돈을 들여 보존해 준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라고 말했다. 그는 “아버님 생전에 기증할 곳을 찾았어요. 그런데 당시 서울 무교동 대한체육회 2층에 약간의 유품들이 전시된 걸 보고는 ‘이건 아니다’ 싶었죠”라고 회고했다.

김상구 선생의 심정이 이해가 됐다. 현재 대한체육회가 관리하는 체육박물관은 태릉선수촌 내 스케이트장 2층에 있는데 찾는 이가 거의 없다. 2012년 취재를 갔을 때 올림픽 선수단복은 곰팡이가 슬어 있었고, 양정모 선수가 1976년 몬트리올에서 딴 올림픽 첫 금메달은 당시에 만든 재떨이와 함께 진열돼 있었다.

김상구 선생은 “유품을 국가가 보존하면 좋은 점 중의 하나가 ‘관람’ 입니다. 많은 분들이 넓고 편한 장소에서 관람하면서 역사 공부를 하고, 특히 젊은 선수들이 어려웠던 시절 선배들의 모습을 보고 영향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기념품도 아이들 색칠공부를 할 수 있게 만든다든지 해서 체육박물관이 교육과도 연결됐으면 합니다”고 소망을 전했다.

김정연 선생은 문(文)과 무(武)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붓글씨와 그림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고, 예술가들과 잘 어울렸다. 한국 현대만화의 선구자인 ‘코주부’ 김용환 선생이 그려 준 초상화를 소중히 여겼다. 한국 추상미술 1세대 김환기 화백, ‘바보산수’의 운보 김기창 화백, 홍익대 총장을 역임한 이대원 화백과도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태릉선수촌에 ‘88 서울올림픽 대승 기념’ 글씨를 써 준 적도 있다.

김정연 선생은 월간중앙 1972년 4월호에 ‘빙상생활 20년의 회상’이라는 제목의 기고를 했다. 젊음을 불사른 스피드 스케이팅을 그는 이렇게 시적으로 표현했다.

‘지금도 내 마음은 언제나 싸늘하면서도 아름다운 빙면에서 뛰놀고 있다. 스피드 스케이팅은 스포츠이면서 예술이며 어떤 면에서는 빙판의 서정시이기도 하다. 강인한 고투(苦鬪)와 의지를 요구하는 스포츠가 이렇게 아름다운 몸의 선을 보여주는 예술도 드물다’.

그의 강인한 고투가 74년을 이어 내려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3개의 금메달(모태범·이상화·이승훈)로 꽃을 피웠다. 현재는 언제나 과거에 빚지고 있다.

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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