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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트랙 따라 날지 않는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49호 34면

내게 말 붙이지 마라. 칼날 위를 질주하는 중이다. 앞은 어두워 주행선도 가늠하기 어렵다. 크고 작은 파편들이 비수처럼 날아온다. 찰나의 방심에 나는 충돌하고 추락할 것이다. 세상의 아우성이 악귀처럼 귀를 헤집는다. 마찰음, 파열음, 충격음 그리고 비명. 그래도 나는 오른쪽 트랙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면도날만 한 틈만 보이면.

서현의 상상력 사전: 스케이터

내가 그렇게 살았어. 왜 달리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어. 아장아장 걷던 때도 있었겠지. 주변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기억은 있어. 여기저기서 걸음이 빨라졌어. 별수 없지. 나도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어. 좀 힘들어도 따라가야지. 느낌은 생생해. 오른쪽 트랙으로 싸악 옮겨 갈 때의 그 맛. 허공으로 붕 뜨는 것 같은 신기한 체험이었어.

이후는 트랙 이동의 과정이었어. 비디오게임으로 치면 레벨업이겠지. 물론 속도를 더 높여야 해. 힘들어도 중독성이 있어. 그리고 게임 속 무기, 갑옷 같은 신기한 아이템들을 만나게 돼. 바퀴가 있더라고. 자전거였어. 페달을 밟는 대로 죽죽 나가. 환상적이야. 팽팽하게 맞는 바람이 상쾌하더라고.

그런데 트랙이 좁아서 위험해. 다른 자전거와 부딪칠 때도 있지. 그냥 밀치고 가야 해. 아니면 내가 나동그라진다고. 새 아이템이 필요하지. 트랙을 바꿔야 해. 미식축구 선수들 무지막지한 보호대 차는 거 알지. 무겁고 불편하지만 장착해야 해. 넘어진 뒤에 남 탓 해봐야 루저들의 변명일 뿐이야.

그런데 자꾸 오른쪽을 보게 돼. 신기한 아이템으로 무장한 친구들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지나 가. 죽을 힘을 다해서 옆 트랙으로 올라갔지. 오토바이를 탄 거야. 또 다른 세계였어. 보호 장구가 무거워도 힘이 안 들어. 문제는 속도지. 그래서 더 위험해. 트랙은 점점 어두워져서 주행선도 잘 안 보여. 넘어지면 치명적이야.

승용차 트랙으로 올라갔어. 중요한 건 딱 두 가지야. 속도 유지와 전방 주시. 자동차전용 트랙이라서 무조건 일정속도 이상으로 주행해야 해. 주변에서 수시로 트랙을 바꿔 들락거리니까 잠시도 방심하면 안 돼. 사고 나면 목숨이 오가는 거야. 차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는 궁금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아. 그냥 모르는 차들이 위협적으로 달릴 뿐이야.

계속 가속기 밟고 있으려니 몸이 심상치 않아. 가다 보면 고속주행자를 위한 드라이브스루 병원이 있어. 무슨 햄버거 가게 같지. 정지가 불가능하니까 검진도 그렇게 받아야 해. 의사들 하는 소리가 뻔하고 똑같아. 운동 부족에 과로와 스트레스네요. 푹 쉬셔야 합니다.

하나마나 한 소리야. 곳곳에서 충돌사고가 나고 사고 잔해들이 눈앞으로 휙휙 날아다녀. 그런 세상인데 푹 쉬는 건 뭐야. 게다가 내 오른쪽 트랙에서는 굉음이 가득해. 깜깜한 공간인데 헤드라이트만 보여. 스포츠카들이 거의 빛의 속도로 달리는 거지.

그런데 좀 이상한 게 느껴졌어. 오른쪽에는 총알처럼 질주하는 자, 왼쪽에는 오토바이와 자전거로 허우적거리는 자, 그 왼쪽에는 슬슬 달리고 적당히 걷는 자들이 보여. 분명 속도가 다 다른데 나란히 가고 있는 거야. 이게 뭐지. 나는 축지법 같은 건 믿지도 않아. 유리창 내리고 멀리 왼쪽에서 걷고 있는 녀석에게 소리쳐서 물었어. 손짓 발짓 하면서 뭐라고 그러는데 안 들려. 창밖으로 몸을 빼고 무슨 상황인지 보다가 사고가 났지. 차는 산산조각났고 나는 여기로 왔어.

동그란 트랙을 달리고 있던 거야. 속도를 내서 트랙을 옮기면 더 큰 원을 돌아야 해. 속도가 올라가는 만큼 달려야 할 거리가 늘어나니 결국 다 나란히 가는 거야. 트랙이 동그란데 출발점이 어디 있겠어. 출발점이 없으니 결승점도, 목적지도 없어. 목적지가 없으니 완주도 없고 환희도, 축하도 없지. 오직 속도만 있어. 어둠 속을 달리고만 있는 거지.

여기는 밝아. 꽃도, 노을도 보여. 팔베개하고 누우면 구름도 보여. 노을이 얼마나 화려한지, 구름이 얼마나 신기한지는 말로 설명이 안 돼. 생각해보면 내가 서 있는 곳이 세상의 복판이야. 나는 다시는 동그란 트랙을 그려놓고 질주를 하지는 않겠지. 트랙 없는 빙판의 피겨 스케이트 선수를 생각하면 돼. 트랙을 지우면 목적지에 가는 게 아니고 가는 곳이 목적지야. 두 팔을 벌리고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봐. 우아하게, 그리고 찬란하게.

하늘을 봐. 새들이 날아가는 곳에는 트랙이 없어.

서현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본업인 건축 외에 글도 가끔 쓴다. 건축에 관한 글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뒤집는 건축적 글쓰기방식에 더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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