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核을 뛰어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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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 사상 처음으로 남북한과 주변 4강이 같은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미.영.중.소 연합국 수뇌들은 상대를 바꿔가면서 카이로와 얄타와 포츠담에서 3자회담을 열고 한국의 운명을 요리했다.

종전 후에는 미.영.소 외상(外相)들이 모스크바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논의했다. 카이로회담에는 소련이,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에는 중국이 빠졌다. 그때의 중국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였다. 패전국 일본의 불참은 당연했다.

6자회담에 남북한과 4강이 모두 참석하는 것 만으로도 일단 역사적이다. 2+4가 되어버렸다. 통일을 포함한 한반도 문제 해결의 최종 단계에 가면 반드시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한국 문제의 국제화'가 앞당겨진 셈이다.

19세기 말 열강의 각축 속에서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 된 이래 처음으로 남북한이 4강과 대등한 자격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아 한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이론적으로 6분의 2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물론 6자회담의 의제는 북핵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가 예상하는 대로 협상의 앞날에는 가시밭길이 놓여 있다. 북한과 미국의 입장이 날카롭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미국에 북한 체제를 확실하게 보장하라고 요구하고, 미국은 북한이 '투명하고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핵 포기를 선언하기 전에는 알맹이 있는 양보를 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래서 한.중.일.러시아가 얼마나 북한과 미국을 움직일 수 있을지가 주목된다. 그러나 이들 네 나라의 입장에도 차이가 있어 그들 간의 일사불란한 공조를 기대할 수 없다.

한국은 대책없는 '주도적 역할'만 염불 외듯 하고, 일본은 미국과 밀착하고, 러시아가 북한에 대한 고강도의 압력에 동조할지도 의문이다. 중국은 북한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지만 북한이 미국과 중국의 야합을 의심하고 있어 그 영향력의 약효가 반감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조건에서 열리는 6자회담의 성공 기준은 무엇인가. 이건 당연한 의문이다. 윤영관(尹永寬)외교통상부 장관이 잠정적인 대답을 줬다고 생각한다.

"차기 회담의 일정을 확정하는 것들을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6자회담의 역사적인 의미가 큰 것과, 협상이 잘 되고 잘 못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사흘 동안의 첫번째 6자회담에서 알맹이 있는 합의를 기대할 수는 없다. 결렬 안 되면 성공이겠다.

북핵 협상은 여러 해 걸리는 지루하고 고달픈 협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회담마다 후속 회담에 합의하면서 반걸음씩만 전진해도, 아니 크게 후퇴만 하지 않아도 북한이 핵을 향한 마지막 남은 한걸음을 내딛는 것을 방지하고 '북한 핵시설을 공격하자' '김정일을 제거하자'는 미국 강경파의 주장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벌면서 6자회담은 논의의 폭과 차원을 북핵에서 북한과 한반도 문제로 넓히고 높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핵 위기의 원인은 두가지다. 하나는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어기고 핵개발 프로그램을 몰래 진행한 것, 다른 하나는 부시 정부가 클린턴 정부의 북한 정책을 백지화한 것이다.

클린턴은 북한의 핵포기에서 북.미관계 정상화에 이르는 로드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부시 정부에는 대량살상무기 보유와 수출을 차단한다는 불굴의 의지 말고는 북한 정책이 없다.

핵문제는 북한 문제 전체의 틀 안에서 해결되어야 확실한 구속력을 갖는다. 북한 문제는 한반도 문제요, 한반도 문제는 동북아시아 문제다. 핵을 뛰어넘어야 핵문제가 해결된다는 아이러니다.

미국은 북한 정책을 제시해야 하고, 6자회담은 동북아시아판 CSCE(유럽안보협력회의)까지 시야에 둘 필요가 있다. 1975년 헬싱키에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바르샤바동맹(소련.동유럽) 회원국이 중립적인 국가들과 함께 출범시킨 CSCE는 불가침, 신뢰 구축, 인권에 관한 3대 선언으로 냉전 종식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거기서 다자간 안보체제는 바로 이웃이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