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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경찰 도움 못 받은 '염전 노예', 3000만원 국가 배상"

중앙일보

입력

염전에 갇혀 가혹하게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이른바 ‘염전 노예’ 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이 국가로부터 손해배상금을 받게 됐다. 파출소에 도움을 요청했다가 무시당했던 박모씨다.

"새벽에 염전 탈출해 경찰에 도움 호소, #경찰 외면으로 좌절감 극심했을 것" #나머지 피해자들은 고의성 등 입증 안 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2부(부장 김한성)는 8일 박씨 등 피해자 8명이 국가와 전라남도 신안군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국가는 박씨에게 정신적 손해에 대한 위자료 3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자를 포함하면 배상금은 3700여 만원이다.

염전노예 사건은 2014년 1월 신안군 신의도 염전에 감금돼있던 장애인 두 명이 구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시각장애인 김모씨는 세 차례나 염전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자 2013년 서울에 있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김씨의 어머니로부터 신고를 받은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2015년 1월 2일 CNN은 새해 첫 한국 뉴스로 '염전 노예' 사건을 다루며 '생지옥(A living hell)'이라고 표현했다. [CNN 인터넷판 기사 캡쳐]

2015년 1월 2일 CNN은 새해 첫 한국 뉴스로 '염전 노예' 사건을 다루며 '생지옥(A living hell)'이라고 표현했다. [CNN 인터넷판 기사 캡쳐]

경찰 수사 결과, 김씨가 일했던 염전의 주인은 직업 소개업자로부터 70만원에 김씨를 넘겨받아 부당하게 일을 시켰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정부가 민·관 합동 전수조사에 나섰고 63명의 피해자가 확인됐다. 피해자 중 상당수가 장애인이었다. 염주들은 이들이 지능이 낮고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점 등을 악용해 숙식 제공을 빌미로 임금을 체불하고 폭행 등 인권유린 행위를 했다.

전남 신안군 신의도 염전 모습. [중앙포토]

전남 신안군 신의도 염전 모습. [중앙포토]

이후 2015년 11월, 장애인단체 등 30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만든 ‘염전노예장애인사건 재발 방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피해자 8명에 대해 “경찰과 고용노동부, 지방자치단체의 관리 소홀로 염전노예 사건이 일어났다”며 2억4000만원 상당의 정신적 위자료 청구 소송을 냈다. 근로감독관은 정기적으로 사업장(염전)을 감독해야 하는데 직무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신안군청은 직업소개소를 제대로 감독하지 않았으며, 경찰관은 피해자의 신고를 묵살했다는 주장이었다.

재판부는 8명 중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고도 외면 당했던 박씨에 대해서만 청구한 위자료를 모두 인정했다. 재판부는 “박씨가 새벽에 염전을 몰래 빠져나와 도움을 요청했는데 경찰관은 지적장애가 있는 박씨를 보호하고 염주의 위법한 행위를 조사하기는커녕 염주를 파출소로 부르고 자리를 떠났다”고 밝혔다.

이어 “경찰관의 행동으로 인해 박씨는 결과적으로 염전에 돌아가게 됐다”며 “섬에서 가족이나 친인척 없이 생활한 박씨가 도움을 요청할 상대방은 사실상 경찰밖에 없었는데, 당시 느꼈을 당혹감과 좌절감이 극심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염전 노예' 사건을 다룬 영화의 한 장면. [영화 '섬. 사라진 사람들' 스틸컷]

'염전 노예' 사건을 다룬 영화의 한 장면. [영화 '섬. 사라진 사람들' 스틸컷]

다만 박씨와 함께 소송에 참여했던 강모씨 등 7명에 대한 청구는 기각했다. 재판부는 “염전에서 지적장애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주지 않으면서 일을 시키고 폭행·감금 등 위법 행위가 일어난 사실은 관련 형사 판결 등으로 인정된다”면서도 “경찰과 감독관청, 복지담당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위법한 공무집행이 있었는지에 대해선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피해자들의 법률 대리를 맡았던 서창효 변호사는 “일반적 손해배상 소송에선 불법행위에 대한 입증 책임이 원고에게 있지만 이 사건은 좀 완화해 적용돼야 한다. 이 같은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아 판결문 검토 뒤 항소 여부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서창효 변호사(왼쪽에서 두번째)와 김재왕 변호사가 판결 직후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오종택 기자

서창효 변호사(왼쪽에서 두번째)와 김재왕 변호사가 판결 직후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오종택 기자

김재왕 변호사는 “아쉬움이 남는 판결이지만 국민이 국가기관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때 무시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걸 확인했다는 것이 이번 판결의 의의”라고 설명했다.

‘염전 노예’ 피해자들이 염전 업주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는 법원에서 인정된 사례가 있다. 지난 5월 광주지법은 1년 2개월 동안 염전에서 일한 피해 장애인에게 염전 업주가 1억6087만원의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김선미·문현경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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