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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구한말 러시아 외교의 데자뷔 … ‘부동항’서 얼어버린 북핵 해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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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문재인 대통령이 북핵 문제라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6~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을 때 큰 기대감을 드러내는 청와대 관계자는 없었다.

문 대통령, 친근감 내세우며 제안 #푸틴은 “북 막다른 골목 몰면 안돼” #러, 100여 년 전 한반도 정책처럼 #현재도 ‘힘의 균형’ 유지되길 원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지난 3일 북한이 6차 핵실험을 한 다음날 심야에 이뤄진 전화 통화에서 대북 원유 공급 중단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문 대통령에게 “한반도의 핵 문제는 오로지 외교적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며 미리 쐐기를 박았기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은 정상회담 전날인 지난 5일에도 “북한은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면 풀을 먹으면서도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은 6일 푸틴 대통령을 마주하자 “연배도 비슷하고, 성장 과정도 비슷하고, 기질도 닮은 점이 많아서 많이 통한다고 느끼고 있다”며 친근감을 표하며 대화 분위기를 좋게 만들려 했다. 푸틴 대통령이 추진하는 신(新)동방정책과 자신의 신북방정책을 거론하면서는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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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마치 벽과 같은 푸틴 대통령의 일관된 입장은 동방경제포럼에 주빈(主賓)으로 참석한 문 대통령의 면전에서도 이어졌다. 푸틴 대통령은 “감정에 휩싸여 북한을 막다른 골목에 내몰면 안 되고, 철저히 냉정하게 긴장을 고조시키는 조치를 피해야 한다”고 했다.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북한의 도발을 절실하게 바라보는 마음을 한낱 감정의 문제로 치부한 셈이다.

이튿날인 7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만난 문 대통령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로 인한 동북아시아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양국이 과거사 문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자”고 뜻을 모았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 문제가 많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김정은의 광기(狂氣)를 막아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번 동방경제포럼은 여러모로 한·미·일과 북·중·러로 짜인 동북아의 ‘신(新)냉전구도’를 확인하는 자리처럼 보였다. 아무리 우리가 목소리를 높여 북한을 규탄해도 중·러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그래도 푸틴은 솔직하게라도 말해 주니 낫다”는 청와대 관계자의 말이 그나마 위안일까.

겨울에 얼지 않는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극동 지역으로 진출하던 러시아는 1860년 연해주를 영토에 편입시키면서 조선과 국경이 맞닿게 됐다. 그때부터 러시아는 우리와 역사적으로 연결되는 일이 잦았다. 조선의 왕이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관으로 대피했던 아관파천(俄館播遷)에서 알 수 있듯이 구한말 조선은 러시아를 가깝게 느꼈다. 그렇지만 당시 러시아가 힘없는 조선을 감싼 건 다른 열강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조선을 둘러싼 정세가 현상 유지되기를 바랐던 이유가 크다.

러시아가 한반도와 맞닿은 이후 157년 만에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은 문 대통령은 철저히 전략적 계산을 하는 러시아의 현실을 더욱 체감했을 것이다. 여전히 그들은 한반도를 둘러싼 힘의 균형이 깨지길 원치 않고 있는 모습이었다.

부동항(不凍港)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핵 문제의 해빙(解氷)이 시작되기에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현실이 너무도 냉엄했다.

블라디보스토크=허진 기자 b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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