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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강사 되려다 강자 되었네, 역경 넘어 별로 뜬 이정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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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국내 여자투어(KLPGA)에서 시즌 3승째를 거둔 이정은.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다른 선수들보다 뒤늦게 골프를 시작했지만 남다른 노력으로 한국 여자골프의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 [사진 KLPGA]

국내 여자투어(KLPGA)에서 시즌 3승째를 거둔 이정은.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다른 선수들보다 뒤늦게 골프를 시작했지만 남다른 노력으로 한국 여자골프의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 [사진 KLPGA]

우승한 바로 다음 날이라 쉴 만도 한데 이정은(21·사진)은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 그래서 28일 이정은이 다니는 한국체육대학교 근처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공부도 제대로 하고 싶다”고 했다.

4세 때 아버지 교통사고로 다쳐 #집안 형편 어려워져 힘들게 자라 #티칭 프로 되려고 시작했지만 #독하게 훈련, 짧은 시간에 급성장 #올 시즌 3승, 상금랭킹 1위 독주 #스포츠 ‘성공 사다리’ 희망 보여줘

이정은이 올 시즌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3승을 거뒀다. 상금랭킹과 평균 타수 등 주요 타이틀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새로운 스타다. 이정은의 아버지 이정호씨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이다. 딸이 4세 때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정은은 아버지가 운전하는 장애인용 자동차를 타고 투어 생활을 하고 있다. 반대로 골프장에서는 이정은이 종종 아버지의 휠체어를 밀어준다.

가족은 전남 순천에서 어렵게 살았다. 김봉주 전 국가대표 감독(현 경기도 골프협회장)은 “정은이와 아버지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찾아왔다. ‘순천에는 여성 티칭 프로가 없으니 세미프로가 되면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을 것’ 같다면서 도와달라고 했다. 정은이 눈빛이 밝아 인성이 좋아 보이고 심지도 굳어 재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경기도 용인에 있는 아카데미에 장학생으로 소개했다”고 말했다.

이정은은 독하게 훈련을 했다. 여자 선수로는 드물게 100kg짜리 역기를 메고 스쿼트를 했다. 이정은은 연습장에 가장 일찍 나가서, 가장 늦게까지 훈련을 했다. 숙소에 들어와서도 운동을 하면서 스윙을 생각했다. 꿈 속에서도 스윙을 했다.

이정은은 초등학교 때 취미로 골프를 하다 그만뒀다. 제대로 골프를 한 건 중학교 3학년 때다. 다른 아이들 보다 5년 정도 늦었다. 순천에서는 제대로 배우지 못해 나쁜 습관만 들었다. 고교 2학년 때인 2013년 국가대표 감독 김봉주씨를 만나 진짜 골프를 알게 됐다.

2년 만인 2015년 국가대표가 됐다. 그 해 가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몇 달만에 3부, 2부를 거쳐 1부 투어 출전권을 땄다. 지난해엔 신인왕, 올해는 최고 선수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유례를 찾기 힘든 빠른 성장이다.

왜 그렇게 열심히 했을까. 이정은은 “어릴 때 집안이 어려워 큰 엄마 손에 자라기도 했다. 가족 외에도 도움을 받은 분이 많다. 그 분들은 생활도 여유롭지 못한데 나를 도와주셨다. 나도 그분들을 도와야한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운동했다”고 말했다.

10대 소녀가 100kg 역기보다 훨씬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런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었을 것 같다. 이정은은 “실제로 그런 현실에 부딪혀 보세요. 눈에 걸리는 사람이 많아 도망가지 못할걸요”라고 말했다. 세상에는 아이를 버리고 도망가는 아빠·엄마도 많다. 그런데 이정은은 “아버지의 발이 되어 주고 싶다”면서 틈날 때 마다 휠체어를 민다. 이정호씨는 “내가 무슨 복이 있어 이런 효녀 딸을 얻었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국내 골프계에는 이정은처럼 드라마틱하지는 않아도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한 선수가 꽤 많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이를 숨긴다. 창피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것은 골프로 치면 오버파를 안고 시작한 것과 같다. 그 오버파는 자신의 잘못으로 생긴 것도 아니다. 그런 선수가 성공한다면 좋은 환경에서 자란 선수가 성공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가치가 있다. 그래서 어려웠던 환경은 창피한 것이 아니고 자랑이다. 스포츠 선진국에서 그런 성공은 대중에게 더 큰 사랑을 받는다. 더 큰 스폰서도 얻는다. 사회구조는 점점 공고해진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으로 가는 사다리는 많이 부서졌다. 부자의 자식들이 부자가 되기 쉽고, 연예인도 대물림 되는 세상이 됐다. 그러나 스포츠 무대는 공정하다.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의 아들일지라도 농구 선수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스포츠가 주는 메시지는 점점 커지는 듯하다. 사람들이 스포츠를 보는 본질적인 이유는 스윙머신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400m 앞에 있는 구멍에 작은 공을 빨리 집어넣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과정에서 어려움을 이겨내는 인간의 정신을 보고 희망과 위안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스포츠 스타들이 좋은 결과를 얻는 것 만큼이나 대중에게 역경을 극복한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는 것도 중요한 의무다. 이정은은 그걸 매우 잘 해내고 있다.

성호준 골프팀장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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