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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갑자기 세상이 컴컴해졌어요" 시각장애 딛고 박사학위 취득한 이우호 영어교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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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때 시력을 잃게 될 거라는 걸 알았습니다. 정말 막막했어요."

군 입대 전 신체검사서 '망막색소변성증' 판정받은 이우호씨 #양쪽 시력 잃었지만, 영어교사의 꿈 가지고 사범대학 입학해 #지난 25일 대구대서 '특수교육학과 시각장애아교육' 박사학위 취득 #이씨 "나와 같은 중도실명자들에게 희망 심어주고 싶어"

24일 오후 5시 대구 남구의 대명동 한 카페. 이우호(42)씨가 중앙일보와의 만남을 위해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아 카페로 들어섰다. 현직 영어교사인 이씨는 20년 전 양쪽 눈 시력을 완전히 잃어 앞을 보지 못한다. 그는 20살 군입대를 앞두고 받은 신체검사에서 '망막색소변성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24살 중증시각장애인 1급 판정을 받았다.

24일 오후 대구의 한 카페에서 시각장애를 딛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우호(42) 현직 영어교사가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백경서 기자

24일 오후 대구의 한 카페에서 시각장애를 딛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우호(42) 현직 영어교사가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백경서 기자

이씨는 "청소년기에는 그냥 원시라서 잘 보이지 않는 줄 알았다. 정확히 알게 된 건 20살 때였다"라고 운을 뗐다. 처음에는 실명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약이었다. 어느 날 이씨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녹음 도서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책을 읽기 위해 장애인도서관을 찾았다. 다만 당시엔 아직 장애등급을 받지 않아 책을 빌릴 수 없었다고 한다.

이씨는 "책을 빌리기 위해 중증시각장애 1급 등록을 하면서 '아, 내가 시각장애인이구나'라고 인정이 되더라. 또 책을 읽으면서 세상에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24살 장애인학교인 대구광명학교를 찾은 이씨는 수능을 준비해 2년 뒤인 2001년 대구대 영어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12년간의 노력끝에 2013년 영어교사가 됐다. 임용을 준비하면서 석·박사에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씨는 지난 25일 대구대학교 2016학년도 후기 학위수여식에서 '특수교육학과 시각장애아 교육'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음은 이씨와의 일문일답.

학사 전공은 '영어교육'이고 박사 학위는 '특수교육학과 시각장애아 교육'이다. 전공을 달리한 이유는 
나는 중도 실명자다. 당시 실명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특수 교육은 부담됐다. '내가 장애가 있는데, 장애가 있는 학생을 잘 가르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고민을 하다가 대구대에서 매년 50여명의 장애인을 '장애인 등 대상자 특별' 전형으로 뽑는다는 걸 알고 영어교육학과에 지원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니까 오히려 장애 당사자가 같은 마음에서 더 잘 교육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뭐가 힘든지 더 공감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석사부터 특수교육을 전공하게 됐다. 

이씨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시각장애학교 중등학생의 학습동기, 학습태도, 영어 학업성취도 간의 관계'다. 전국 12개 시각장애학교 중등학생 236명의 기초자료를 수집해 학습동기와 학습태도, 영어 학업성취도 간의 상관관계를 밝혀냈다.

논문쓰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논문은 누구에게나 다 어렵겠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자료는 읽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우선 중도실명자라 점자책을 보는 게 서툴었다. 게다가 인터넷 파일은 점자로 돼 있지 않다. 학교 동료들이 내가 볼 수 없는 파일들을 읽어주거나 대구대학교 장애인지원센터에서 파일을 점자로 번역해 줬다. 사진설명도 말로 표현해 주시더라. 정말 감사했다. 
시각장애를 딛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우호(42) 현직 영어교사가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있다. 백경서 기자

시각장애를 딛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우호(42) 현직 영어교사가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있다. 백경서 기자

이씨는 임용시험에 4번 도전한 끝에 합격했다. 3년 간 경북여자고등학교에 재직한 뒤 올 3월 대구 달서구 본리동 예담학교로 발령받았다. 현재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학교 수업은 어떤가
학생들이 수업을 잘 따라와줘서 고맙다. 초반에는 걱정을 많이 했는데 수업 중에 피피티(PPT)가 잘못 넘어갈까봐 애들이 오히려 전전긍긍하더라. 수업 중에 칠판에 쓴 내용을 찾아 밑줄을 그을 때 간혹 위치를 잘못 잡는 경우가 있는데 그냥 함께 박장대소 한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선생님, 더 왼쪽에 밑줄을 그어야 해요"라고 말했는데 지금은 "선생님, 왼쪽으로 10㎝정도 간 다음 바로 밑에 내용이 있어요"라고 상세하게 말한다. 시각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을 많이 하는데, 이게 진짜 교육아닌가 생각이 든다. 함께 생활하면서 점점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학생들이 몰래 자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학생들이 자고 있는지 귀신같이 안다.(웃음) 학생들이 대답하는 목소리가 커졌는지, 줄었는지만 듣고도 알 수 있다. 또 학생들이 저를 보고 있는지 여부도 안다. 공기의 흐름이 정말 다르다. 지금 앞에 있는 분(기자)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느껴진다. 땡땡이 치는 것도 물론 알 수 있다.
지난 25일 중증시각장애 1급 이우호씨가 대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 대구대]

지난 25일 중증시각장애 1급 이우호씨가 대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 대구대]

제자들에 대해 얘기하는 이씨의 얼굴에는 웃음이 만연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항상 '이교실의 주인공은 너희들'이라고 말한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나아가서는 이씨와 같은 중도실명자들에게도 꿈을 심어주고 싶다고도 했다. 이씨는 "강연이든, 수업이든 제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것"이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대구=백경서 기자 baek.kyungs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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