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 배넌 자른 트럼프 ‘미국 우선’ 버리고 글로벌주의로 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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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선거에서 쟁취한 트럼프 정권은 끝났다.”

극우 성향 수석전략가 떠나며 #맥매스터·틸러슨·매티스 입지 커져 #“대외 군사작전, 내부 브레이크 제거” #배넌 “난 자유, 트럼프 정권 끝났다” #쿠슈너 등 정권 핵심 공격할 수도

지난 18일(현지시간) 백악관 수석전략가에서 경질된 스티브 배넌(63)이 극우 성향 매체 브레이트바트의 회장으로 복귀하자마자 내놓은 일성이다. 배넌은 이날 보수 매체 더위클리스탠더드와의 인터뷰에서 “난 이제 자유로워졌다. 무기를 다시 내 손에 쥐게 됐다. 반대하는 것들은 철저하게 박살 내겠다”고 했다. 문제는 박살 내겠다는 상대가 트럼프 정권을 비난하는 야당과 주류 언론(뉴욕타임스·CNN 등)인지, 아니면 자신을 백악관에서 쫓아낸 존 켈리 비서실장, 재러드 쿠슈너(트럼프 사위) 백악관 선임고문 등 ‘옛 아군’인지 명확지 않다는 것.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9일 트위터에 “배넌은 브레이트바트에서 터프하고 영리한 새로운 목소리를 낼 것이다. ‘가짜 뉴스’는 경쟁이 필요하다”며 자신을 비판하는 주류 언론에 맞서줄 것을 주문했다.

[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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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넌이 NYT 인터뷰에선 "백악관 밖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계속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트럼프 주변인사들을 공격할 거라는 관측도 있다. 트럼프의 핵심 측근으로서 백악관에서 얻은 쿠슈너, 허버트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의 ‘구린 정보’를 하나둘 폭로할 것이란 분석이다. 트럼프로선 지나치게 국수주의적이고 거침이 없어 정권의 부담이 됐던 배넌을 쳐냄으로써 정권 안정을 노린 것이지만 거꾸로 열렬한 지지층이었던 보수 유권자들의 등을 돌리게 하는 역효과를 낳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동물원’으로까지 불리던 백악관의 무질서와 잡음은 일단 진정될 것으로 보인다. 의회전문매체 더힐은 “해병대 대장 출신인 켈리 비서실장 밑으로 급격하게 질서가 잡히고 있다”고 보도했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존 후닥 선임연구원은 “배넌에 불만이 많던 공화당의 주류파들과 관계가 개선되겠지만 곧 그들은 이 정권의 불안정은 배넌 때문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 때문이란 점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라고도 지적했다.

배넌의 퇴장은 트럼프 정부의 외교정책에도 적잖은 변화를 몰고 올 전망이다. ‘미국 우선’을 주창하며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 강력한 이민법안 마련 등을 주도한 배넌이 물러남에 따라 국제사회의 문제에 적극 관여하는 이른바 ‘글로벌주의자’들이 득세할 공산이 커졌기 때문이다. 미국기업연구소(AEI)의 대니얼 플레카 외교국방 담당 부회장은 “백악관 내 고립주의자와 개입주의자 간 힘의 균형추는 개입주의자 쪽으로 쏠리게 됐다”고 말했다.

당장 배넌의 끊임없는 견제에 시달렸던 강골 군인 출신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등의 입지가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국무부와 국방부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상적인 일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란 예상들이 나온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미국의 대외 군사작전에 대한 내부 브레이크가 제거됐다”는 분석을 했다. 트럼프가 19일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개최한 국가안보회의에서 아프가니스탄 추가 파병을 잠정 결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도 배넌의 퇴진과 무관치 않다고 이 매체는 전했다.

트럼프 정권과 가까운 한 인사는 “트럼프가 영국의 ‘브렉시트’를 적극 옹호하고 유럽연합(EU)·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배경에는 배넌이 있었다”며 “‘포스트 배넌’의 새로운 트럼프 외교가 조만간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배넌이 경질 직전 진보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강조했던 게 ‘중국과의 경제전쟁’이었던 만큼 배넌이 백악관에서 사라지면서 현재 첨예하게 대립 중인 미·중 관계가 다소 톤다운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또 사임 직전 인터뷰에서 한 발언으로 트럼프의 격노를 사 경질의 한 이유로 지목되는 “대북 군사적 해법은 없다” “주한미군 철수 협상을 고려할 수 있다”는 말에 대해선 “특별히 그동안 북한 문제에 개입했기 때문에 한 발언이라기보단 사이가 안 좋은 맥매스터 등을 겨냥해 내뱉은 개인 차원의 생각”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워싱턴포스트(WP)는 배넌의 사임 배경과 관련, “최근 블룸버그 기자가 출간한 『악마의 거래(Devil’s Bargain)』에 배넌을 트럼프와 동등한 관계인 양 묘사했고 책 표지 사진도 트럼프와 배넌이 마주 보고 있어 트럼프의 격노를 샀다”는 색다른 분석을 내놓았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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