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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같아서 딸 같아서 ‘궤변’의 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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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문화부장

양성희 문화부장

“아들 같아서” “딸 같아서” 발언이 정점을 찍었다. 요 며칠 새 온라인을 뜨겁게 달군 ‘공관병 갑질 파문’의 주인공인 박찬주 육군 대장의 부인 전모씨 얘기다. 공관병에게 호출용 전자팔찌를 채우는 등 개인 시종처럼 부린 것에 대해 “아들 같은 마음으로 생각했다”는 해명 아닌 해명을 내놔 들끓는 국민 여론에 기름을 끼얹었다.

성희롱 인격 모독, 갑질의 변명 ‘자식 같아서’ #자식은 소유물 … 한국사회의 공고한 가족주의

“아들 같다니, 팥쥐 엄마냐”(유시민), “대한민국에서 아들딸로 살기 힘든 이유. 딸 같아서 성희롱하고 아들 같아서 갑질하기 때문”(유병재) 등의 반응이 나왔다. 네티즌도 “아들 같다니 그렇다면 아동학대다” “‘아들 같아서, 딸 같아서’는 한국형 범죄 스릴러 영화 제목으로 적당하다”는 글을 올렸다.

‘아들 같아서, 딸 같아서’ 궤변은 역사가 좀 됐다. 성추행 변명 1호다. “딸 같아서 손을 잡은 적은 있지만 상대방이 수치심을 느낄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아들처럼 귀엽게 생각하고 한 행동으로 성적인 의도는 없었다” “딸 같은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했다” “친딸처럼 예뻐하는 것 알지? 한번 안아보자” 이런 똑같은 레퍼토리들이 반복된다. 세 번째는 여학생들을 성추행한 교회 목사의 말이고, 마지막 발언은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성추행하며 한 것이다. 이 ‘자식 같아서’ 궤변의 백미는 손녀까지 끌어들인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다. 2014년 골프장 캐디 성추행 사건에서 “손녀 같고 딸 같아서 귀엽다는 수준에서 터치했다. 손가락 끝으로 가슴을 한번 툭 찔렀다”는 발언을 해 두고두고 회자됐다. 알다시피 박 전 의장은 이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성희롱과 모욕, 폭언과 비인격적 대우 등 위계 관계에서 발생하는 온갖 갑질을 ‘자식 같아서’로 퉁치려는 심리 뒤에는 자녀를 사적 소유물로 여기는 우리 사회의 오랜 인식이 숨어 있다. 자녀가 귀여우면 자녀의 기분과 상관없이 만져도 되고, 때려도 되고, 아무튼 내 자식이니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것이다. 자녀의 자리에 아내나 연인을 놓아도 된다. 가정폭력·데이트폭력이 그렇게 시작한다. 결별을 요구하는 여자친구를 때려 죽이는 끔찍한 범죄들은 (아내가 될 수도 있는) 내 여자니까 맘대로 해도 된다는 데서 출발한다. 물론 이때 가족은 TV 광고에나 나오는 행복한 우리 집이 아니다. 아버지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나머지 구성원들은 수직적 위계에 놓이며, 개인보다 집단이 우선시되고 순혈주의가 강조되는 가부장적 가족이다.

전통적 가족 관계가 붕괴하고 1인가구, 대안가족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출현하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가부장적 가족주의다. 여전히 ‘국부’ ‘국모’란 단어가 쓰이고, 식당 종업원이나 가사도우미 여성을 ‘이모’라고 부르는 게 상대에 대한 최고의 매너가 되는 사회다. ‘우리가 남이냐’며 사회 전체가 끈끈하게 얽힌 ‘유사가족’을 지향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네티즌의 맹비난을 받은 “혼밥은 (공동체를 깨는) 사회적 자폐”라는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씨의 발언도 이 맥락에 있다. 본인은 혼밥 문화의 사회적 맥락을 지적한 것이라고 항변했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다. 식사 스타일과 취향에 대한 개인의 선택권을 부정한 것일 뿐 아니라 혼밥 하는 1인가구는 비정상이고 문제라는 식의, 가족에 대한 낡은 인식을 전제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자식 같아서’ 타령으로 돌아가자면, 사춘기 딸내미 문제로 한창 갈등할 때 한 육아 전문가의 조언을 들었다. “자식을 우리 집에 온 손님처럼 대하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자식에게도 남에게 하듯 예를 갖추고 거리를 유지하라는 뜻의 그저 그런 육아 팁으로만 받아들였지만 지금 생각하니 우리 사회에 진짜 필요한 덕목이라는 느낌도 든다. 최소한 ‘손님 같아서 성희롱’을 하고, ‘손님 같아서 학대’를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 ‘남을 가족처럼’ 이런 헛된 소리 말고 남을 남처럼, 남으로나마 제대로 대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양성희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