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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베를린 구상’ 전도사 강경화, 대북제재엔 남 말하듯 “축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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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지금은 사라졌지만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는 독특한 전통이 있었다. 갈라 만찬 때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을 제외한 국가의 외교장관들이 장기자랑을 했다. 2000년 이정빈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이 영어로 유머를 선보인 뒤 한국 대표단은 사물놀이를 해 큰 박수를 받았다. 이때 현지에서 이 장관의 유머 원고를 쓴 이가 강경화 보좌관이었다. 무대 뒤에 있던 그가 17년 만에 한국의 외교부 장관으로 ARF를 찾았다.

8일(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 50 주년 기념식에서 이용호 북한 외무상(왼쪽 둘째)이 강경화 외교부 장관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8일(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 50 주년 기념식에서 이용호 북한 외무상(왼쪽 둘째)이 강경화 외교부 장관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① 베를린 구상 전도사 역할=강 장관은 지난 5일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 나흘 동안 약 20개의 양자 및 다자 일정을 소화했다. 8일 귀국에 앞서 강 장관은 기자들과 만나 “‘베를린 구상’에 담긴 한반도 평화 정착 노력에 대해 각국의 적극적인 지지와 호응을 얻은 점”을 가장 큰 성과로 꼽았다.

ARF서 외교 데뷔전, 강 장관 성적표 #안보리 결의 소감 묻자 미숙한 화법 #왕이 ‘경극 퍼포먼스’ 방어하느라 #중국에 사드 보복 문제는 못 따져 #이용호엔 먼저 말 건네 3분간 대화

실제 아세안 외교장관들은 5일 발표한 북핵 문제에 대한 별도 성명에서 “우리는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 달성을 위해 남북 관계를 개선하려는 이니셔티브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6일 공동성명에는 “7월 6일 베를린에서 제의한 남북 관계 개선과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 정착을 위한 한국 정부의 이니셔티브를 환영한다”는 문구를 담았다. 아세안의 지지 확보로 문재인 대통령이 운전대를 쥔 ‘한반도 평화 자동차’에 약간의 연료가 주입된 상황이다.

7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3(한·중·일)’ 외교장관회의에서 기념촬영 중인 왕이 중국 외교부장(왼쪽)과 고노 다로 일본 외상. 이날 왕 외교부장은 중·일 외교장관회담에서 고노 외상에게 “당신 부친은 정직한 정치가로, 위안부 담화에서도 일본의 성의를 대표했다. 당신이 외상이 됐다는 걸 알고 기대했지만 실망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중국과 주변국의 남중국해 분쟁과 관련해 고노 외상이 “일본은(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이 벌이는) ‘항행의 자유’ 작전을 지지한다”고 말한 데 따른 공세다. 고노 외상의 아버지는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발표했던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이다. 고노 외상은 왕 외교부장에게 “중국은 대국으로서의 행동방식을 익힐 필요가 있다”고 받아쳤다. [AP=연합뉴스]

7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3(한·중·일)’ 외교장관회의에서 기념촬영 중인 왕이 중국 외교부장(왼쪽)과 고노 다로 일본 외상. 이날 왕 외교부장은 중·일 외교장관회담에서 고노 외상에게 “당신 부친은 정직한 정치가로, 위안부 담화에서도 일본의 성의를 대표했다. 당신이 외상이 됐다는 걸 알고 기대했지만 실망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중국과 주변국의 남중국해 분쟁과 관련해 고노 외상이 “일본은(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이 벌이는) ‘항행의 자유’ 작전을 지지한다”고 말한 데 따른 공세다. 고노 외상의 아버지는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발표했던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이다. 고노 외상은 왕 외교부장에게 “중국은 대국으로서의 행동방식을 익힐 필요가 있다”고 받아쳤다. [AP=연합뉴스]

② 왕이 경극 퍼포먼스 철벽방어=강 장관의 데뷔전에서 가장 까다로운 일정은 한·중 외교장관회담(6일)이었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문제로 인한 한·중 간 갈등상황에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왕 부장은 변화무쌍한 ‘연기’로 인해 “외교관이 아니라 경극 배우”라는 말까지 듣는 인물이다.

이번에도 왕 부장은 공격적 태도로 일관했다. 하지만 강 장관도 준비를 했다. 회담 시작에 앞서 태극기와 오성홍기 앞에서 악수를 할 때 강 장관은 처음엔 함박웃음을 지었다가 왕 부장이 굳은 표정을 연출하는 것을 보더니 곧바로 정색하고 미소를 거둬들였다. 준비한 시나리오대로였다.

강 장관은 회담 모두발언에서 왕 부장이 사드 완전 배치를 겨냥해 “양국 관계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말하는 것을 차가운 표정으로 듣다가 자신의 발언 차례가 되자 “방어적 결단”이라고 차분히 응수했다. 회담이 비공개로 전환된 뒤에도 왕 부장을 향해 “현재 사드에 반대하는 중국의 태도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조목조목 반박했다고 한다. 하지만 왕 부장의 ‘경극 퍼포먼스’를 방어하는 데 시간을 쏟느라 정작 중국 측의 사드 보복에 대한 문제 제기는 하지 못했다. 강 장관도 “사드 배치 원인이 북한의 도발에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의견을 교환하다 시간이 없어 문제 제기를 하지 못했다”고 했다.

③ 반보 더 나간 남북 장관 조우=강 장관이 6일 갈라 만찬에서 이용호 북한 외무상과 조우한 것도 시선을 끌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외교부 장관들은 북한 외무상을 외면하거나 악수만 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강 장관은 이 외무상에게 먼저 말을 걸고 3분간 대화했다. 정부 당국자는 “애초에 큰 결과를 바라고 말을 건 게 아니라 북한을 대하는 한국의 태도가 이전과 다르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려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 장관은 7일 ARF 비공개 토론장에서는 이 외무상에게 의도적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북한의 도발을 규탄하는 ARF 회원국 장관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④ 안보리 제재에 축하? 미숙련 화법도=강 장관은 7일 한·미·일 외교장관회담을 주재하는 등 어려운 미션도 무난히 소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불쑥불쑥 숙련되지 않은 표현이 튀어나와 듣는 이들을 의아하게 했다. 6일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과의 회담 직전 외신기자가 새로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2371호)에 대한 입장을 묻자 강 장관은 “축하한다”고 말했다. “우리와 그 과정에서 완전히 상의해 줘 정말 감사하다”는 말도 했다. 북핵 문제의 핵심 당사국인 한국 장관이 남의 일 이야기하듯이 답변하자 취재진도 어리둥절해했다. “동족을 제재하는 것이 축하할 일인가”라는 외신기자들의 반응도 나왔다.

한 번은 실수로 넘어가겠지만 두 번째부터는 실수로 보이지 않을 장면이었다.

마닐라=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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